내 인생의 죽비는 결국 내 과거다. 무지하게 아프다. 어쩌자고 나는 이딴 글을 썼을까. 지금도 매일 후회한다. 내 상처는 시추한 끝에 나온 석유처럼 검고 짙으며 끈적거린다. 마치 추석 연휴에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지금의 더위처럼.
맥락도 탈락하고, 변색조차 일어난 종이 대신 내 곁에는 궤변 덩어리가 생생하게 남아있다.
변색이라도 되었으면 어린 날의 장난이라고 스스로 위안삼을 수도 있었을 것을. 왜 이렇게 생생하게 남았는가. 이딴 걸 대단하다는 식으로 내가 글을 썼던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딴 글에 작업이라는 고상한 말을 붙이는 게 실례다.
수탉이 울지 않아도 세 번 이상을 부정하고 싶은 글이 인쇄되지도 않은, 밝은 모니터 안에서 순진한 눈망울을 들이민다. 부정하고 싶어도 저 글은 내가 썼다는 사실을 ‘문서 이력’은 늘 보장한다.
이럴 때면 세르반테스가 아니라 세르반테스 할아버지가 와도 글을 쓰고 싶지 않다. 돈키호테가 자신이 쓰고 싶은 기사도 소설을 쓰려고 결심했지만, 다른 생각이 들어서 결국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울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지나치게 키보드를 놀리는 일 또한 자제해야 하지 않던가.
서정춘 시인이 등단 33년 만의 첫 시집인 <죽편>을 냈을 때, 자신의 농사가 참혹하다는 사실을 넌지시 말머리에 얹었을 때, 나는 그 눈물의 곡절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제 와서는 그게 가슴 한가운데 있는 과녁에 제대로 꽂힌다.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애기살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어디 하루이틀인가...
세르반테스의 책이나 서정춘 시인의 시집을 알량한 내 글에 견주는 걸 보니, 늦더위를 한 솥으로 먹었나 보다. 더위를 더 먹기 전에 얼른 다른 글로 옛날 글을 덮어씌우고, 백지로 도망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