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교의 절반 이상을 도서관에 다녔다. 말장난이 아니다. 책을 무한정 빌릴 수 있다는 이유로 2학년을 시작할 무렵에 도서부로 들어갔고 거기서 거의 대부분의 쉬는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 때마다 와서 바코드를 찍으며 책을 대출해 주는 일은 즐거웠고, 만화 그리는 일에 한계와 구태를 느끼고 있던 내게 좋은 위로가 되었다.
2학년과 3학년 때, 나를 담당했던 두 명의 담임은 솔직히 말해 내게 그리 좋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무관심하거나, 아님 지나치게 콧대가 높았다. 2학년 담임은 내가 고통받을 때조차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쉬쉬했다. 3학년 담임은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의 전공을 말하자마자 나를 사실상 방치했다. 자기 실적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글을 쓰겠다고 하는 내 행동에 여러 의문을 제기하는 대목에서 진작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나마 두 사람이 내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으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생각하기 싫은 기억 중 하나다.)
도서관 사서이자 도서부를 맡은 담당 선생님은 특이한 사람이었다. 내게 카프카의『성』이나, 제인 구달의 책, 칼 융이 그의 제자와 같이 공저한『인간과 상징』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명상에 관한 이력을 알려주기도 했다. ‘창비 시선’이 1번부터 주르륵 있는 특이한 서가를 눈여겨보기도 하고, 거기서 본 『실존과 무』와 『순수 이성 비판』을 눈여겨보기도 했다. ‘창비 시선’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대학교 때 가서 본격적으로 읽었다. 나 또한 그 당시 고등학생들의 선풍적인 베스트셀러였던 만화책 『식객』을 즐겨 읽은 사람이었으니까. 김애란의 소설도, 이문구의 소설도, 오정희의 소설도 미시사도, 미국사도, 나는 그 도서관에서 처음 접했다.
여름방학이 되자, 도서관을 옮길 일이 있었다. 안전을 위해 도서관을 별관 4층에서 본관 1층으로 옮겨야만 했다. 엘리베이터를 교직원만 이용할 수 있었던 이상한 시절이었기에, 나를 비롯한 도서부원은 7,000여 권이나 되는 장서를 일일이 손으로 옮겨야 했다. 때마침 대여 프로그램도 새로 교체했기에 책에 붙은 바코드 또한 교체해야 했다. 나는 남들보다 한 발 앞서서 아스테이지를 경제적으로 사용하거나, 정확하게 붙이는 스킬을 익혀야만 했다. 누군가 책에 낙서를 해서 보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새로 들어온 도서가 꽂힌 서가를 볼 때마다 입꼬리가 두 귀까지 걸린 걸 느낄 수 있었다.
도서관은 이내 넓어졌고, 따로 쉴 수 있는 공간 또한 생겼다. 학교는 의욕적으로 도서관을 또 하나의 특별 교실로 삼았다. 사서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도서부를 밀어줬다. 다른 학교와 교류도 주선하면서, 다른 고등학교 도서관으로 탐방을 가보기도 하고, 고등학교 도서부 연합회와 더불어 플래시 몹과 같은 이벤트도 진행했다.
무엇보다 거기서는 내가 글을 쓸 자유가 보장되었다. 일진들이 대놓고 주먹을 날리지는 않았지만, 거기 있는 사람들 또한 내가 하는 걸 이해하고 배려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는 이제 도서관을 글 쓰는 장소로 삼기 시작했다.
3학년이 지나면서 도서부 생활도 후배에게 맡겼는데도 나는 도서관을 들락날락했다. 야간자율학습을 안 나가는 나는 저녁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졸업식과 더불어 도서관을 마지막으로 찾았을 때, 사서 선생님은 마침 업무 때문에 안 계셨다. 공립 고였는지라, 내년이 되면 사서 선생님은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셔야만 했고, 도서관은 다른 사서 선생님이 자리하신 지 오래였다. 나는 어머니 손길에 이끌려 얼른 나와야 했다.
도서관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선생님은 잘 지내고 계실까. 그때 알고 지낸 사람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을까.
(도서관과 상관없이 만난 은사님은 제외하고) 나는 도서관 하나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을 겨우 견뎠다. 도서관의 시간마저 없었다면, 나는 어디선가 반드시 무너졌으리라. 물론 지금도 고등학교 동창회에 들어간다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내 ‘즐거웠던 학창 시절’은 어디까지나 중학교와 대학교만 이야기할 수 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만난 모든 사람을 그리운 마음으로 추억한다. 나는 참 운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