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9일
누군가는 머리에 새치가 눈에 띌 때 나이 든 거라고 말했다. 누군가는 술이 달다고 생각할 때 나이가 든 거라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선지해장국이란 단어에서 군침을 흘릴 때가 나이가 든 거라고 말했다. 나는 말한다. 맛에 대한 견해가 변한 사람이야말로 진정 나이 든 사람이라고.
신맛만 해도 그렇다. 좋았거나 미처 느끼지 못했던 신맛을 나이 들어서는 못 먹는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신맛이 싫었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서 미각이 둔해지는 이유로 인해 신맛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좋았던 것이 더 좋아지거나 안 좋았던 것이 더 안 좋아지는 건 극히 드물다.
나는 군대를 전역하기 전엔 오이를 못 먹었다. 어느 여름날 오이지무침에 물만밥을 먹은 나는 느끼지 못한 종류의 행복을 느꼈다. 그 뒤로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거의 다 죽어가던 입맛에게 오이가 CPR을 해준 것이다. 이제는 집에서 해 먹는 냉면에도 오이를 많이 넣기도 하고, 감자 샐러드에 들어간 오이도 정성스레 손질한다.
군대가 딱히 지내기 좋은 데는 아니었지만, 거기서 편식을 고쳤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히 내 기억에 박혔다. 그래도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 하나가 있었다. 생토마토나 방울토마토에 익숙해지지 못한 것이었다. 그 편식만 거기서 고쳤으면 완벽했을 텐데.
‘편식을 고치기 위해선 고생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입맛이 없으면 배고파도 뭘 먹질 못한다. 배가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음식을 먹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뭐가 넘어가지 않는다. 유격훈련으로 거의 빈사 상태였던 내 입맛을 돌려놓은 건 고추참치와 맛다시, 그리고 굽지 않은 스팸이었으니까.
나는 그저 사람은 환경에 따라, 주어진 맥락에 언제나 달라질 수 있다는 생물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 또한 그런 ‘진화’의 산물이니까. 원래 사람도 사랑도 변한다. 변절과 변화를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따름이다. (이견도 있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분 짓는 것은 완고하고 끈질긴 환상에 불과하다’고 아인슈타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도 사람도 맛에 대한 생각도 변하므로 식탁도 변한다. 나는 지금 3분 카레와 볶음밥, 편의점 도시락으로만 때우던 시절을 지나, 풋고추와 쌈을 거의 매일 식탁 위에 올리는 삶을 살고 있다. 물론 푸성귀가 싫다고 하는 어른들도 있을 것이다. 풋고추를 쌈장에 찍어먹으면서 맛있다고 웃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든 각자의 식탁은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밥상머리에서 뽀뽀뽀를 TV로 보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밥상머리에서 핸드폰을 보는 아이들을 나무라는 아이러니는 지금도 변하지 않을 테지만 말이다.
구태여 변치 않겠다고 팔짱을 끼고 절개를 지킬 필요가 없다. 어떤 것은 변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낫다. 그래야 변치 말아야 할 것에 제대로 온 힘을 쏟을 수 있다. 변화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는 방법은 변화에 몸을 던지는 데서 시작한다. 가끔은 그게 무섭고 그래서 더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