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서점을 다섯 군데 들렀다. 역시나 그이의 책은 없었다. 대형서점은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와서 많이 사기 때문에 오히려 책이 없을 수 있다는 내 오랜 경험이 이번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고 싶었던 책은 없었고, 남은 책이라고는 물에 젖은 흔적이 역력한, 그이의 책『검은 사슴』뿐이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책이었다.『채식주의자』를 비롯한 2000년대에 나온 그이의 소설책은 이미 다 읽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한 서점을 떠올렸다. 아파트 단지 사거리에 있는, 언덕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조그마한 지하 서점이었다. 때마침 사전 투표도 있었기 때문에 그 일도 치를 겸해서 도로 집 밖을 나왔다. 가을 햇살은 아직 뭉툭해지지 않은 칼날을 달며 나뭇잎과 거리와 피부를 마구 찔렀다. 거리에서 인부들이 보도블록을 정비하고 있었다.
옅은 물 냄새를 맡으면서 가파른 계단을 내려갔다. 여전히 변함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코너를 봤고, 거기서『작별하지 않는다』를 만났다. 강렬한 표지의 참고서와 커다란 덩치의 자격증 서적 사이에서 그래도 가판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얼른 집어서 계산대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주인은 한창 자기 뒤쪽에 있는 책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이의 등에 대고 조심스레 여기『소년이 온다』라는 책이 있냐는 물음을 던졌다. 주인은 대수롭지 않게 계산대를 빠져나와 내가 살폈던 서고에서 하나의 책을 가져왔다. 바로 그 책이었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소년이 온다』만 샀다. 오는 길에 첫 몇 페이지를 눈으로 훑으며 주민 센터에 들렀다. 사전 투표를 하던 와중에도 나는 그 책을 집은 손을 영 놓지 못했다. 투표장은 한가했지만, 참관인들은 진지하게 자신들의 일에 임했다. 책 문체의 가지런함과 참관인들의 가지런한 태도가 내가 찍는 도장 끝에 약간 힘을 더 불어넣었다. 나는 약간 번진 도장이 엉뚱한 곳에 번질세라 접는 것도 조심히 접으며 투표함에 용지를 집어넣었다.
그로부터 한 사흘이 지난날에 나는 다시 그 동네 서점에 갔다.『작별하지 않는다』가 눈에 밟혔다. 어떤 고상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날 걸린 곽란이『소년이 온다』의 독서를 방해했다. 글자를 볼 때마다 사달이 났다. 며칠째 죽만 먹었고 의도치 않게 속세의 음식과 연을 끊었다. 그날은 처음 밥을 먹었고,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으로만 걸려있던 책들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식생활을 며칠 정순(貞純)하게 했지만 그게 마음까지 정순하게 만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인터넷 서점의 배달이 너무나 편리하다는 점은 잘 알았지만, 그이의 책은 이제야 배송을 준비 중이거나, 배송 중이었다. 나는 그걸 기다리기 싫었고, 대형서점까지 가서 사 오기도 싫었다. 인터넷 기사로 그이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얼른 그이의 책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들렀던 다섯 군데 서점 중엔 그 서점보다 열악한 사정의 서점도 많았으니까. 공교롭게도 햇살은『소년이 온다』를 샀을 때 들렀던 날처럼 땡볕의 기운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저 은행잎이 약간 더 노랗게 바뀌었고, 공사하던 인부들이 위치를 바꿨으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버스가 달랐을 뿐이었다.
책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었다는 듯이, 하얀 글씨의 제목을 드러냈다. 자리도 바뀌지 않았다. 나는 들렀던 서점의 몇몇 빈칸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오전에 여의도에서 중국 음식을 먹는다는 계획은 취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집었다.
주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내가 건넨 책을 보고 ‘이걸 어디서 찾았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가판대에서 찾았다고 이야기했다. 주인은 다른 사람들이 그이의 책이 있는지 찾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 카드를 카드단말기 윗부분에 있는 구멍에 꽂았다. 궁금한 이야기라면 그냥 못 지나치는 내가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인기가 많냐고.
주인은 웃으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해줬다. ‘자신들은 대형 서점에 가는 게 부끄럽고 그냥 동네 서점에서 이 책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는 게 주요 골자였다.『소년이 온다』를 전에 집어주셨다는 이야기를 내가 하자 주인은 처음 들었다면서 예약이 많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또 들려줬다. (이 때는 내가 처음에『작별하지 않는다』를 먼저 집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계산대에 비스듬히 있는 모니터를 봤다.『채식주의자』와『소년이 온다』를 손 글씨로 쓴 포스트잇 몇 장에 모니터 가장자리에 붙어있었다. 포스트잇에서는 전화번호도 있었다.
대화 속에서 내가 알거나, 다녀간 서점들이 카탈로그 페이지 넘어가듯 하나 둘 기억나고 있었다. 어느 서점에서 무슨 책을 집었는지에 대한 기억 또한 스치듯 지나갔다.
책 자체에 대해 약간의 수다를 나눈 나는 책을 들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그늘 하나 없이 도로를 물들이는 햇살을 피하며 나는 횡단보도 쪽으로 한달음에 걸어갔다. 그늘진 길에 도착해서야 책의 처음 페이지를 읽었다. 나는 후기를 봤다. 책의 첫 두 페이지를 쓰고 몇 년 뒤에 나머지 내용을 썼다는 그이의 문장이 눈에 띄었다. 나는 일단 책을 가방 속에 집어넣으며 (운동 겸) 산책을 마저 나갔다.
루이스 글릭의 한국어 번역 시집을 가슴 벅차오르도록 읽었던 적이 있다. 볕 잘 드는 데에 앉아서 곽란으로 중단한 『소년이 온다』를 다시 읽는다. 민들레 홀씨처럼 이곳저곳으로 날아간 책이 사람들 가슴께에 얼마나 많은 민들레를 피울까 생각하면서, 괜스레 앉은 채로 두 발을 공중에 휘휘 젓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