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
강남 어느 라멘집에서 처음 먹은 라멘을 나는 맛있게 먹지 못했다. 호기롭게 매운 된장 라멘을 주문했건만, 돌아온 건 하루종일 니글니글거리는 속이었다. 라멘에 대한 내 인상이 워낙 최악이어서, 몇 년이 지나도록 인스턴트 라면조차 손을 못 댈 정도였다. 육군 훈련소에 있었을 때 나는 내 앞에 온 컵라멘을 식판과 나란히 놓으며 어떻게 먹어야 할지를 고민했다. 나는 결국 불려 먹는 편을 선택했다. 자대 배치를 받은 다음에도 부대 내에서 군 생활 내내 국물 있는 면을 뽀글이로 해 먹지 않았다.
도쿄에 가서도 라멘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기 오면 라멘에 대한 인상이 지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호텔 근처의 이치란[一蘭] 라멘을 먹기 위해 줄을 서야 했던 1시간 반의 시간은 내게 고문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줬다. 그래도 전보다는 먹을만했지만, 어쩐지 그 라멘은 1시간 반의 고통스러운 기다림을 보상하기엔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친구의 부탁을 들고 도쿄를 다시 찾았다. 나카노[中野] 브로드웨이라는 곳에 들렀다. 나는 애니메이션 굿즈(Goods)에서 중국 동전과 독일 기차 모형과, K-pop 아이돌을 파는 수집품 가게의 미로를 해쳤다. 에스컬레이터가 2층으로 가지 않고 3층으로 올라가고, 2층으로 가기 위해선 계단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을 때, 나는 괜히 부탁을 들어줬다면서 속으로 앙분(怏忿)을 품었다.
볼 일을 마치고 역으로 되돌아가는 길에 나는 이 근처에 라멘 집이 있다는 정보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핸드폰을 켜고 구글 지도를 봤다. 상점가는 (파사주에 가까운) 아케이드라서 비를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바람까지 막을 수는 없는지 추운 바람이 상점가 전체를 맴돌았다. 나는 상점 건물과 건물 사이에 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아오바[靑葉]라는 붉은 글씨가 흰 바탕의 천에 써진 걸 보고 약간은 놀랐다. 약간 구석진 곳에 있을 줄 알았는데, 대각선 방향으로 패밀리 마트 편의점에도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그래도 흐린 날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아 보였다. 찬바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기본 라멘을 주문한 나는 먼저 국물을 한 수저 떠서 맛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나는 차슈와 멘마(죽순절임)와 같은 고명을 먹은 뒤에야 면을 맛보았다. 나는 그제야 아는 형이 그렇게 말했던 “라멘은 천천히 익숙해지는 음식”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동네 중국집 프랜차이즈에 가서 라멘 한 그릇을 시켰다. 라멘은 금방 나왔고, 수 십 분 뒤, 내게 남은 건 생각보다 맛나게 먹었다는 감상과 빈 그릇이었다. 선입견도 선입견이지만, 금세 적응한 나 또한 어리둥절하여 호텔로 돌아오는 내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재료만 놓고 보면 내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 내가 싫어하던 음식으로 첫 만남을 가졌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사람의 식성이나 취향은 반드시 예상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라멘과 볶음밥, 혹은 교자랑 같이 먹는 일은 익숙해지지 않았지만.
글을 쓰는 내내 다른 라멘집의 라멘은 어떤 맛일지 궁금해졌다. 아직도 끔찍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억의 굳건한 벽을 호기심이라는 곡괭이가 천천히 부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