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5. X-94-30
어쩌면 그이의 작업은 눈물 젖은 붓으로 한없이 슬픔의 윤곽선을 캔버스에 그리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슬픔에 골몰하며 표현을 모색한 그이의 작업은 이 앨범에 이르러 잊을 수 없는 내면의 풍경화(이자 자화상)를 그렸다.
정말이지 깊숙하고 세련되게 우울 속에 몰입하는 이 앨범은 이소라의 깊은 몰입이 거대한 설득력이 되어 듣는 이의 가슴속으로 밀물처럼 계속 밀려든다. 이 몰입은 김민규가 만든 「듄」을 단순한 망상의 곡으로 들리지 않게 바꾸고, 신대철이 만든 「Fortune teller」를 (트립합의 옷을 입은) 단순한 재즈 곡에 머무르지 않게 한다. 이소라의 조응력 높은 보컬은 앨범에서 가장 얌전한 성격의 곡인 「봄」에 깊고도 깊은 ‘존재의 허무’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조규찬의 완벽에 가까운 보컬 편곡과 디렉팅이 이소라의 보컬을 더욱 깊은 층위로 만들었지만, 지구 저편에 떨어지는 핀셋 하나에도 미묘한 변화를 주며 반응하는 이소라의 예민한 감성이 아니었던들 이 앨범이 이토록 사무치진 못했으리라.
그이의 데뷔작이었던 『낯선 사람들』에서 시작한 그이의 가사 쓰기 또한 이 앨범에 이르러 곡의 감정과 완벽하게 어우러진다. 「바람이 분다」의 비극적 시간을 인수분해 하며 곱씹는 듯한 그이의 가사는 단호하면 단호할수록 역설적으로 슬픔이 배가하는 독특한 미감의 경지를 이룩했으며, 「별」의 두운과 각운과 음절 수까지 멋지게 조절한 그이의 가사는 노래에 선명한 감정과 고풍스러운 격을 부여했다.
앨범의 첫 두 트랙인 「Tears」의 허무와 「Midnight Blue」의 이별에서 촉발된, 이소라가 만든 ‘슬픔의 바다’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라는 에필로그에 닿을 때까지 일렁거린다. 이 앨범의 곡을 제공한 작곡가들은 자신의 지류에서 벗어난 물을 조심스레 이 깊은 자리로 흘려보냈다. 김민규(스위트피)가 만든 「별」이나 「듄」처럼 작곡가의 특징이 보이는 곡도 있고, 이한철의 「아로새기다」처럼 기존의 이한철이 쓰던 곡과 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곡도 있다. 다소 전위적인 성격도 있는 정재형 작곡의 「siren」 또한 이 바다에 무람없이 합류한다. 이소라는 이들을 깊이 받아들이며 자신의 바다에 녹인다. 조응력이 높은 가사와 뛰어난 몰입을 구사하는 목소리만으로 이룩한 이 앨범의 흐름은 그윽하고 깊게 이어진다. 어찌나 그윽하게 이어지는지, 참여한 작곡가의 곡마다 레코딩 세션 또한 달리 참여했다는 사실조차 깜박 잊을 정도다.
이소라는 여기에 자연스러운 인간의 결 또한 불어넣었다. 이한철의 또 다른 걸작인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그대로 부르는 이소라의 보컬은 도리어 그 자연스러움 때문에 더욱 사무친다. 한 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부르는 그이의 보컬은 이 앨범을 결국 삶으로 승화시킨다.
앨범에서 와중(渦中)을 담당하는 「이제 그만」에서 이소라는 체념의 차분한 감정을 애증으로 표현한다. 전작에 비해 훨씬 뭉뚱그리는 그이의 보컬은 그이의 감정이 지닌 결 덕분에 훨씬 가슴에 와닿는다. ‘우울의 바다’ 속에 가라앉아도 끝내 인간의 숨을 움켜쥔 이소라의 목소리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을 조심스레 일깨운다. 우린 결국 사랑이 필요하다고. 아프고 비참한 결말로 치달아도 사랑의 여정은 꼭 통과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