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6. X-0-81
밀도 높은 사운드가 두 개의 시디를 그야말로 가득 채운다. (대부분의 곡을 박창학의 감성 어린 가사와 더불어 만든) 윤상이 처음으로 자신의 집에서 믹싱 과정을 손수 한 이 앨범은 윤상의 손길이 마스터링을 제외한 모든 곳에 닿은 최초의 앨범이다. 전작인 2집을 둘로 나눠가며 음악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머뭇거렸던 그는 이 앨범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사운드 안에 모든 곡을 집결시켰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윤상은 자신의 고민과 창작을, 양태와 관점이 달라질지언정, 매번 숨 막힐 정도로 치밀한 프로세스에 투영한다. 어찌나 치밀한지 때로는 그의 사운드가 그의 수고를 정말이지 적게 반영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그는 고민했고, 만들었으며, 제시했다. 나 같은 일반인은 빙산의 일각인 결과물 밑에 얼마나 어마어마한 게 숨어있을지 감히 다 짐작하지 못하리라.
첫 번째 시디는 신곡을 모았다. 『Renacimiento』에서 시작한, 월드뮤직에 대한 그의 관심이 이 첫 번째 시디에 비교적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연히 Paris에서」는 윤상의 (드럼 사운드 파형까지도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통제된 사운드에서도 멜버른 오케스트라의 스트링과 박용규의 기타와 잘 어우러지며, 반도네온이 등장하는 「나를 친구라고 부르는 너에게」는 윤상의 목소리와 더할 나위 없이 어우러진다. 삼포나(Sampona)를 비롯한 남미 민속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에콰도르 연주자 밴드인 시사이 밴드가 세션으로 참여한 「바람에게」는 이른바 ‘월드뮤직’의 향취에 윤상의 음악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작품이다. 노영심과 듀엣을 이룬 「문득 친구에게」는 노이즈 섞인 사운드와 스트링이 잘 어우러지는 수작이다. 소위 ‘윤상표 리버브’ 편곡의 진수를 보여주는 「사랑이란」이나, 「내일은 내일」과 같은 작품 또한 좋지만, 신디사이저 음이 지닌 파형을 날카로운 현악 파트(와 디스코의 리듬 기타)를 절묘하게 매치시킨 「Back To The Real Life」나 같은 도회적 성격의 곡도 이 앨범의 사운드를 빛낸다.
두 번째 시디는 그가 제대한 이후에 낸 사이드 작업을 한데 모았다. 신해철과 협업한 『노땐스 골든 힛트 일집』과 『Renacimiento』에 있는 두 개의 한국어 노래, 그리고 『Insensible』 EP에서 리믹스와 연주곡을 제외한 나머지 네 노래를 모았다. (물론 윤상은 이 시디 안에 든 모든 곡을 전부 리마스터링을 하며 행여나 있을 각 곡의 편차와 실수를 줄였다.) 윤상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을 한꺼번에 모은 두 번째 시디는, 윤상 스스로가 소수점 아래의 헤르츠, 하나의 ‘1주기’, 0.001초의 시간과 매번 싸우면서 끝내 쟁취한 사운드를 확실한 결과물로 들려준다. 윤상의 빼어난 걸작인 「배반」에서 시작하여 「기념사진」으로 끝맺는 이 파트의 흐름은 들을 때마다 소름 돋는다. 뽐내지 않으면서도 치밀하게 쌓은 이 앨범의 사운드는 인간적인 따듯함마저도 거머쥔 채로 우리 가슴에 머문다. (남들이 144p의 해상도의 고민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드는 동안,) 그는 8K 울트라 HD의 해상도의 고민을 바탕으로 음악을 만들었음에도, 생각의 미로에 갇히지 않고, 기술에 매몰되지 않으며 ‘마음’을 잃지 않았다.
윤상의 음악은 세밀한 정서를 다루는 음악일수록 토대가 더욱 탄탄해야 한다는 점을 사운드로 증명하여 펼친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앨범은 윤상 사운드의 ‘오대양 육대주’를 윤상 자신의 손길로 끝까지 기록한 첫 ‘세계지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