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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MIN Jul 16. 2024

겨울, 산책자의 호수

7월 16일

  혼자 있고 싶은 아침마다 산책한다. 집 근처에선 하지 않았다. 늘  때마다 아침 산책을 했다. 어디 펜션 같은 데서 하루 묵는 일이 있다면 더더욱 그랬다. 아침만 되면 나는 으레 숙소를 빠져나와 근처를 배회했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캠프에 참석하여 어느 수련원에 하루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거길 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마지막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밭과 개 짖는 소리를 벗 삼아 무작정 걸었다. 모험심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소박한 역마살이 내 작은 두 발에 힘을 불어넣었다.

  

  이른 새벽이라 그런지 차도 지나가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귓바퀴를 차갑게 식혔다. 애벌레가 제법 갉아먹은 배춧잎 구멍에 이슬과 햇살이 한 몸으로 부대끼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기도 하고, 녹슨 철창에 두 발을 올린 채 짖는 백구와 데면데면한 거리를 유지하기도 했다.


  아마도 나는 숙소 생활의 답답함을 모포에 묻은 먼지를 털듯이 한꺼번에 털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책하는 내내, 어두운 감정의 넓은 폭 안으로 천천히 햇살과 안개의 차가움과 푸릇한 희망이 풋내처럼 몸에 뱄다. 파릇파릇한 몸이 어느새 숙소에서 너무 멀리 떠나왔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첫 '산책'은 그렇게 끝났다.

      

  내 산책의 X가 ‘시골’이라면, Y는 ‘기분 전환’ 일 테다. 대학교 들어가면서 Z가 생겼다. ‘술’이었다. 세상이라는 입체에 내동댕이쳐진 나는 주로 초봄에 학교 수업을 열심히 듣기만 했다.


  술은 그 뒤에 들러붙어서 나를 놓지 않았다. 작가 특강이 있던 늦봄, 문학기행을 떠났던 가을,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한 겨울, 1학년 종강과 더불어 삼삼오오 모여서 계곡으로 간 여름. 예전에 만난 친구들과 떠난 MT. Z는 무럭무럭 자랐다.     


  MT의 추억이 각자마다 다 다르다지만, 내 추억은 여지없이 아침 산책으로 추려졌다. 아침에 산책하려고 일부러 술을 마시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술보다 분위기에 취해 잠들었던 나는 으레 눈곱만 겨우 뗀 눈을 한 손으로 비비적대며 밖을 나서곤 했다.      


  그때가 오리엔테이션 마지막 날이었던가. 아직 추운 겨울날, 아침부터 펜션을 나온 나는 표지판에 적힌 '호수 두 글자에 혹해서 그대로 얼어붙은 호수까지 간 적이 있었다.


  ‘둘레길’이라는 말이 생경했던 시절, 길은 말 그대로 '오프로드'였다. 땀이 이마와 어깨 뒤를 차분하고 시원하게 짓눌렀다. 그러나 호수를 보고 싶다는 일념이 더욱 강했다.      


   지금도 나는 빙판 깔린 길이 나를 언 호수로 데려갔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으로 만난 언 호수의 감격에, 빙판길을 살금살금 걸었던 기억이 토끼 눈을 뜨며 도망치지 않았을까 지레짐작할 뿐이다.


  언 호수는 산그늘 속에서 푸른빛을 조심스레 내보였다. 산은 갈색과 고동색의 나뭇가지들을 어김없이 드리웠고, 나는 괜스레 주위에 든 돌 하나를 던졌다. 쩍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귓속을 통과했다. 찬 바람이 불었다. 소매 안에 파고드는 바람이 허리를 지나 등골을 타고 뒷목으로 올라왔다. 나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얼음이 갈라질 때 생긴 하얀 선이 번개가 몸을 통과하듯이, 어깻죽지까지 타고 반대쪽 옆구리를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빙판 위에 마른 잎이 떨어졌다. 잎은 마치 빙판에 미끄러진 사람처럼 데구루루 굴렀다. 시퍼렇게 피어오른 입김을 산그늘에 보태며 나는 발길을 돌렸다.   


  기억은 거기서 끝났다. 조금은 후회스럽다. 고등학생 때 떠난 제주도 수학여행에서 나는 늘 손에 펜과 공책을 놓지 않았다.  지금을 알아볼 수 없는 공책에 나는 모든 일정과 감상을 적어놓았다. 왜 이 산책은 구체적인 감상을 적지 않았을까. (핸드폰에 사진기가 붙는 걸 이상하게 여기던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왔다.) 나는 왜 무작정 길을 나섰을까. 돌이켜보면 그다지 숙취에 시달린 것도 아닌데.       

  

  생각의 장점과 단점은 결국 한 몸이라는 걸 깨달을 즈음, 영화 한 편을 만났다.『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내가 본 영화가 리메이크 버전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에서 사진기자로 분한 숀 펜이 이렇게 말했다. 가끔은 사진을 찍지 않고 그대로 그 순간에 머무르고 싶다고. 그가 렌즈를 통해 바라보던 눈표범의 모습에서 나는 언 호수를 떠올렸다.      


  나는 그저 거기 있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레, 그저 거기에 머무르고 싶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깨달음은 그렇게 우둘투둘 등뼈가 튀어나온 기억의 등을 쓰다듬으며, 버티느라 수고했다고 가만히 위로했다. 사라진 길의 기억을 대신하여, 언 호수가 선명하고 푸른 눈빛을 얻었다.    

  

  전역한 이후로 내 생각의 성좌는 위치를 달리했다. 산책도 피트니스와 행군 사이에 몸을 뒤척이면서 나름의 의미를 달리했다. 나는 도시 한가운데를 산책하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X는 '발 디딜 수 있는 곳'으로, Z는 '이온음료'로 바뀌었다.


  목욕을 해도 다 씻지 않은 느낌이 들어 어깨를 괜스레 만지작 거릴 때, 떨어진 채 뒹굴면서 메마른 은행나무 잎처럼 마음이 버석거릴 때, 기억 속에서 용케 살아남은 호수가 고동색의 속눈썹 사이에 있는 깊은 눈동자로 나를 지켜보는 게 느껴지곤 한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추억이 무엇인지를 지금도 나는 헤아릴 수 없다.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겨울눈 같은 기억이 무엇이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품 안에 넣은 '길 타래'를 주섬주섬 꺼내 당신에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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