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22-72-76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앨범의 「제발」을 조금 더 좋아한다. 전인권이 내지르는 「제발」의 절규도 훌륭하지만, 최성원의 나긋나긋한 미성으로 부르는 ‘지친 목소리’를 나는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수록곡 간의 격차도 있고 한계도 분명한 이 앨범은 열악한 사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더 빛나는 구석 또한 갖췄다.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을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등장하는 이광조의 미성은 (조용필과 김현식이 먼저 구사했긴 했지만) 팔세토 창법의 아름다움을 전면에 드러내고, 강인원이 부른 「매일 그대와」는 작곡가인 최성원 자신이 부른 버전보다 (적어도 미려함 면에서) 앞선다. (아직은 함춘호가 참여하지 않은 하덕규 1인 체제의) 시인과 촌장의 「비둘기에게」는 이펙터를 걸어놓은 하덕규의 애원하는 보컬이 인상적이며, (아직은 이병우가 참여하지 않은 조동익 1인 체재의) 어떤날이 부른 「너무 아쉬워하지마」 또한 곡 특유의 정조와 격조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양병집의 「이 세상 사랑이」는 (당시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했던) 조동익이 가장 직접적으로 작사, 작곡을 통해 드러낸, 프로그래시브 록의 영향이 짙은 곡이다. 박주연의 그윽한 목소리가 일품인 「그댄 왠지 달라요」 또한 최성원이 작곡한 발라드다. 이 두 곡 모두 새로운 성향의 노래를 들려준다는 이 앨범의 목적에 충실한 신선함을 담고 있다. 「이 세상 사랑이」의 스케일은 그 당시 어떤 곡과 견주어도 궤를 달리하며, 「그댄 왠지 달라요」를 그윽하게 부르는 박주연의 보컬은 서툰 솜씨임에도 자기만의 느낌을 살릴 줄 아는 영리함을 갖췄기 때문이다.
컴필레이션 음반의 성격을 ‘전시회’로 규정한 이 앨범은 거의 최성원이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 앨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곡을 만들었으며, 의욕적으로 함께 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조동익은 이 앨범에서 자신의 일렉트릭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면서 처음 세션 녹음에 참여했고, 훗날 최성원과 더불어 들국화의 피아니스트(이자 들국화 사운드의 핵심을 담당한) 허성욱 또한 이 앨범에서 최성원과 본격적으로 의기투합했다.
이 앨범 이후로 하덕규는 (예전에 같이 합을 맞춘) 함춘호와 더불어 시인과 촌장을 다시 일으켰으며, 말 그대로 이곳저곳을 방황하던 전인권은 최성원과 허성욱을 다시 만나며 들국화를 결성했다. 조동익은 이병우를 불러들이며, 듀오 체재의 어떤날로 거듭났다. 박주연은 솔로 앨범을 발매하는 한편, 당대의 작사가로 거듭나며, 자신의 음악적 센스를 발전시켰으며, 양병집은 길고 긴 음악 생활 속에서도 끝끝내 혜안을 잃지 않으며 자신의 길을 나아갔다. 이 앨범을 통해 많은 뮤지션이 모였고 많은 뮤지션이 나아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앨범은 전시회의 성격도 갖추었지만, 동시에 정거장이나, 교차로의 성격 또한 갖췄다고 하겠다.
「따로 또 같이」의 2집과 더불어 새로운 음악의 출발을 알렸던 이 앨범은 그러나 이 앨범의 참여한 뮤지션의 아우라를 거두고 들어도 괜찮은 곡이 즐비하다고 생각한다. 이 앨범의 수록곡 버전보다 훨씬 발전된 사운드를 들려준 곡이 물론 더 많지만, 그럼에도 무심결에 지나칠 수 없는, 파릇파릇한 재기가, 열악한 사운드를 뚫고 솟아오르는 앨범이 바로 이 앨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