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의 회색빛만이 거리를 채우던 시절, 가로등의 주황빛이 거리를 따사롭게 물들이면, 그들은 신촌의 카페에 모여서 블루스를 연주했다. 유명한 사람도 있었고, 잊힌 사람도 있었고, 무명인 사람도 있었지만, 거기선 모든 사람이 동등했다. 블루스가 그들을 모이게 했으니, 이 앨범이 블루스 앨범이 된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였으리라. 그들은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날실 삼고, 방랑 의식을 씨실로 삼아 이 한 장의 블루스 앨범을 짰다.
7분 여가랑 되는 「봄비」를 재편곡하여 넣거나, (델타 블루스 성격이 강한) 보틀넥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이정선 작사, 작곡의 「오늘 같은 밤」을 엄인호가 부르게끔 하는 ‘음악적 자유로움’으로 가득한 이 앨범은 (LP 기준으로) 공교롭게도 한영애가 부른 엄인호 작곡의 「그대 없는 거리」로 열고, 한영애가 부른 엄인호 작곡의 「바람인가?」로 문을 닫는다. 블루스 음악을 하는 그들의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정선의 정석을 달리는 기타 연주와 엄인호의 감각적인 기타 연주가 이 앨범에서 가장 인상적이지만, 김동성의 키보드 연주 또한 만만치 않게 인상적이다. 「그대 없는 거리」에서 엄인호의 간주 기타를 이어받는 키보드 연주나, 「봄비」, 「나그네의 옛이야기」를 오르간으로 넉넉하게 채우는 김동성의 연주는 ‘정제된 타협의 산물’로 여길 수 있는 이 앨범의 사운드를 어느 정도 생동감이 있는 사운드로 거듭나게 했다. 이 앨범의 주요 뮤지션으로 참여한 윤명운 또한 자신의 블루스 하모니카 연주와 보틀넥 기타 연주를 이 앨범에 확실하게 남겼다.
이정선이 작곡한 「Overnight Blue」는 LP에서는 A면의 뒤에, CD에서는 맨 마지막 트랙으로 이어진다. 정석적인 블루스 연주로 채워진 이 연주곡은 가요와 블루스를 결합한 엄인호의 곡과, 블루스의 ‘격정’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연주한 이정선의 곡과도 약간 거리를 둔 연주곡이다. 나는 LP의 순서를 존중하는 편이다. (이정선이 만든) 「한밤중에」의 고독과 「아쉬움」에 등장하는 엄인호와 정서용의 듀엣은 감정의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인호와 이정선이 신곡과 더불어 그동안 자신들이 발표한 곡을 가져와 앨범에 크게 이바지하며 혜택을 입었지만, 박인수와 한영애 또한 이 앨범을 통해 혜택을 입었다. 「봄비」와 「나그네의 옛이야기」를 맛깔나게 부르는 박인수의 보컬은 보컬리스트 박인수를 재평가하게 했으며, 「바람인가」와 「그대 없는 거리」를 부른 한영애 또한 이 앨범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 앨범은 바로 다음 해에 나올 2집에 비해서는 조금 심심한 게 사실이다. 본래 방랑인인 엄인호와 학구적인 이정선, ‘흘러간 가수’였던 박인수나, 한영애와 정서용을 비롯한 가수들이 정태국, 김영진, 김동성, 강승용과 같은 연주자들과 더불어 처음 합을 맞췄으니까. 이 앨범의 심심함은 각자를 존중하는 배려와, 블루스를 좋아한다는 공통된 관심 그리고 자유롭고 헐거운 밴드의 성격을 중도적으로 반영한 결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그게 마냥 헐겁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그 수굿한 사운드 속에서 자기가 할 일만큼은 정말이지 제대로 하는, 능숙한 뮤지션들의 어떤 연륜 같은 걸 엿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