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26-57-69
이 앨범의 언어는 어딘지 모르게 달떠있다. 「영원」과 「널 지우려 해」는 담백한 사운드에 살짝 벗어난 포즈를 취하고, 「아이들의 눈으로」는 그 세련된 사운드에도 불구하고 소박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편곡 구조를 자랑하는 「발해를 꿈꾸며」나 「제킬 박사의 하이드」, 개인적인 저항의 성격이 강한 「교실 이데아」의 안흥찬의 스크리밍이나, 「내 맘이야」의 여러 변화를 능숙하게 통합하는 이 앨범의 사운드가 ‘가사’까지도 능숙했다면 나는 그 지나친 완벽함에 의구심을 품었을 테니까.
이 앨범이 이들이 할 수 있는 걸 다해보자는 성격이 매우 강한 앨범이다. 서태지가 원래부터 추구한 록도, 그가 계속 갈고닦은 팝도, 클래식이나, 턴테이블 연주도 이 앨범 안에 다 들어있다. 통일에 대한 염원이나, 억압된 학교 사회에 대한 저항, 폭력 및 약물 중독 반대를 비롯한 거시적 차원의 이야기도, 아이들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도, 팬들을 향한 애정과 고마움도 모조리 모아 마음껏 담은 이 앨범의 메시지는, ‘아이들의 눈’이라는 관점을 지켰기 때문에 간신히 소화불량의 앨범으로 추락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이는 정말이지 죽을 각오로 이 앨범을 하나로 꿰는데 골몰했으리라. 촘촘한 이 앨범의 사운드는 기존의 한국 뮤지션이 구현하지 못한 질감을 당시의 청자에게 들려줬다. 딜레이를 단 기타 연주와 훵크 록의 텐션 높은 기타와 어쿠스틱 기타가 교차하며 연주하는 「발해를 꿈꾸며」의 기타 파트는 한국 대중음악에서 전례가 없는 사운드였다. 당대의 턴테이블리스트인 디제이 큐버트(DJ Qbert)의 스크래치가 등장하는 (서태지가 기타와 베이스를 연주한) 「교실 이데아」와 (팀 피어스의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내 맘이야」의 사운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팀 피어스를 비롯한 베테랑 세션의 연주를 녹음했는데도, 그이는 세션마다 전담 테크니션을 두는 정성을 들였다. (서태지의 개인 스튜디오에서 전부 녹음하고) LA에서 믹싱한 「아이들의 눈으로」를 제외하고, 이 앨범에 있는 대부분의 수록곡 레코딩은 1970년대에 설립한 전통 있는 스튜디오인 LA의 콘웨이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제이슨 로버트(그는 훗날 YG 엔터테인먼트의 음악을 전문적으로 믹싱하는 엔지니어가 되었다.)의 엔지니어링과 더불어 이뤄졌으며, 이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작업한 결과물의 믹싱은 (니켈백의 명반인 『Silver Side Up』이 녹음된) 벤쿠버의 그린 하우스 스튜디오에서 (메탈리카와 머털리 크루의 레코딩에 참여한) 랜디 스타우브(Randy Staub) 엔지니어의 손에 의해 이뤄졌다. 전작까지 개인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사운드를 구축한 서태지는 이 앨범의 녹음을 위해 마스터링을 비롯한 작업까지 해외 뮤지션과 협력했다. 물론 이런 과정이 늘 성공으로 돌아오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이는 자신의 사운드를 만든다는 일념만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과정을 돌파했다.
(유일하게 양현석이 가사를 쓴) 「널 지우려 해」는 이 앨범의 숨겨진 걸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앨범의 양가적인 감정을 설득력 있게 담은 이 곡은 순수의 상실을 잃은 두려움과 그럼에도 걸어가야 하는 다짐의 번민을 발라드와 메탈의 교차로 담백하게 잘 그려냈다. 세상의 모든 억누르는 손길을 막는 방패가 되고자 한 이 앨범은 바로 그 담백함 덕분에 지금까지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이 바로 이 앨범에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