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곡」에서 ‘사노라면’을 신디사이저로 연주하는 허성욱의 연주가 끝나면, 주찬권의 파워 넘치는 드럼이 「북소리」를 연다. 허성욱은 이 곡에서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청자에게 확실하게 들려준다. CD에서는 이 두 개의 곡이 하나의 곡으로 나오지만, LP는 별개의 곡으로 나온다. 허성욱의 키보드 실력은 사뭇 다른 두 개의 곡에서도 고른 솜씨를 유지한다.
전인권이 외친 「사랑한 후에」의 기나긴 후주를 허성욱의 건반은 특유의 우수 어린 터치로 은은히 강조한다. 단순한 배킹 연주임에도 그의 건반은 곡의 정서와 착 달라붙는 묘한 저력을 발휘한다. 허성욱 또한 「머리에 꽃을」과 같은 곡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그의 건반이 리드미컬하게 만든 「머리에 꽃을」 인트로는 정교하면서도 독특하기 이를 데 없다. 「어떤...(가을)」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묘한 연주 속에서도 허성욱의 건반은 건반 연주의 정수를 잃지 않는다. 김정호가 먼저 불렀던 「날이 갈수록」은 김정호의 버전이 약간 더 좋지만, 그럼에도 허성욱의 건반 연주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운드를 없앤 후주의 편곡 센스만큼은 탁월했다. 그 당시에는 (제목도 작곡자와 작사가도 원곡 가수도 잊힌 채) 구전민요의 지위에 있었던 「사노라면...」의 초중반은 허성욱의 느린 피아노 배킹 연주가 제대로 자리 잡고 있다. 초중반에 간간히 등장하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 또한 이런 건반 배킹 연주의 결을 해치지 않는다.
전인권은 여기서 자신의 곡과 남의 곡을 구분 없이 모두 소화하여 부르는 저력을 발휘한다. 「사랑한 후에」와 「사노라면...」을 가져온 그이의 음악적 센스는 그가 뮤지션이기 이전에 특별한 귀를 지닌 청자라는 사실을 청자에게 알려준다. 원곡을 밀도 높은 감정으로 번역한 「사랑한 후에」의 높은 완성도는 그이의 이러한 음악관이 상업적 타협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맴도는 얼굴」과 간접적으로 이어진 듯한) 「여자」나 형이상학적인 물음을 몸의 한계로 말하는 「이유」를 작곡한 그의 창작력은 이 앨범이 당당한 창작집 중 하나임을 분명히 한다.
들국화의 앨범에 이어 이 앨범에 드럼을 맡은 주찬권은 여전히 자신의 파워풀한 드러밍을 이 앨범에서도 들려준다. 「이유」를 강타하는 드럼도, 「어떤...(가을)」의 멜로디에 착 달라붙는 드럼도 훌륭히 소화하는 그의 드럼은, 허성욱과 전인권의 이름을 전면에 걸었음에도, 여전히 이 앨범이 밴드의 앨범임을 강조한다. 이 앨범에서는 베이스 세션으로만 참여한 최성원은 곡이 미처 챙기지 못한 저음부를 확실하게 챙기는 절제된 베이스 연주로 앨범의 곡을 확실히 뒷받침했다. 최구희가 연주하는 「어떤...(가을)」의 리드 기타 사운드는 함춘호의 리드 기타 소리와 더불어 이 앨범의 충만한 사운드에 빛나는 (그리고 적합한) 재기를 다시 한번 부여했다.
들국화의 데뷔 앨범이 결과적으로 그들을 최고의 밴드로 거듭나게 했던 앨범이었다면, 이 앨범은 들국화라는 모임이 자신의 열정과 성의를 다해 그들의 최선을 들려준 앨범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의 에너지를 그대로 지닌 이 앨범은 들국화에 다룬 주제마저 발전한 대목 또한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들을 때마다 들국화의 어떤 가능태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상상하곤 한다. ‘머리에 꽃을’ 다는 세계를 그들이 상상했던 것과 마찬가지 자세로 상상한다. 그러나 그들의 상상 또한 상상에 그쳤듯, 이 앨범의 가능태 또한 상상의 영역에서 머무르는 데에서 그쳤다. 스냅사진을 찍는 느낌으로 나온 이 앨범은 그렇게 한 밴드의 마지막 꿈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