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9. 66-56-66
정태춘은 이 앨범에서 많은 것을 양보해야만 했다. 「시인의 마을」은 개사를 거치며 전혀 다른 뉘앙스의 곡으로 변했다. 이 곡의 사색은 바뀐 언어로 인해 도리어 표백되었다. 그러나 남은 것도 있다. 「서해에서」의 울음과 (김민기의 흔적이 엿보이는)「아하! 날개여」의 ‘날개’는 훗날 「비둘기의 꿈」의 ‘날개’과 「저 들에 불을 놓아」의 울분으로 발전한다. (앨범 내에서 보기 드물게 화려한 현악 편곡이 들어간) 「그네」는 (박은옥이 부른) 「봉숭아」와 같은 곡을 예비하며, 훗날 자신이 직접 고쳐 부르는 「목포의 노래 (여드레 팔십리)」는 그의 ‘물길’에 대한 관심을 이미 완성된 상태로 표현했다.
물론 이 앨범의 편곡과 연주를 맡은 유지연의 공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전통적인 곡조의 멜로디에도 플루트를 편성하는 대범함을 지닌 그의 음악적 센스가 이 앨범의 수록곡이 지닌 복잡한 성격과 테마를 한아름의 앨범으로 엮는데 성공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네」의 곡조에 맞는 현악 파트를 편성한 대목이나, 「아하! 날개여」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베이스 연주는 그의 편곡이 지닌 센스 덕분에 무람없이 이 앨범에 어울릴 수 있었다. 곡의 단조로움과 진중함을 일정 부분 이어받는 「겨울나무」의 영리한 기타 연주 또한 이 앨범에 잘 어우러진다. 이러한 유지연의 편곡은 여기에 실린 정태춘의 곡이 나름의 음악적 당위성을 지닌 지적인 곡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어필한다.
이 앨범에서 그의 사랑 노래는 제법 흥미롭다. 짧은 소품인 「사랑의 보슬비」는 논외로 한다고 쳐도, 「사랑하고 싶소」와 「촛불」에서 드러나는 정태춘의 사랑 노래는 분산과 집중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명백히 「When I'm Sixty Four」의 인트로를 오마주한 인트로가 들어있는) 「사랑하고 싶소」에서 정념이 담긴 구애를 노래하던 정태춘은 2절과 3절에 이르러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순수와 귀향의 테마를 풍경과 더불어 꺼낸다. (이 앨범의) 「시인의 마을」에서 (적게나마) 등장한 방랑의 의지와, 마지막 곡인 「산너머 두메」에 등장하는 귀환의 테마가, 이 한 곡에서 절묘하게 합쳐진다. (훗날 「북한강에서」로 시작하는 감성적이고 지리적인 여정을 그는 자신의 데뷔 앨범에서 처음 드러낸 것이다.) 반면에 「촛불」은 정태춘의 사랑 노래가 어느 정도의 집중력을 가졌는 지를 청자에게 들려줬다고 생각한다. 정태춘은 촛불에 자신의 정념을 담았다. ‘태우리라’는 표현 속에 많은 상념이 담긴 이 곡은, 후일 (박은옥과 같이 부르는)「사랑하는 이에게」를 가지런하게 부르는 그의 집중력 있는 진심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자칫 열등감에 빠져서 더 원망할 수도 있었을 대목에서 미련 때문에 말을 아끼는 그이의 사려 깊은 어조는 원망과 정념에 (실은 체념에 가까운) 초탈을 한 이후에도 여전히 강한 여운을 청자의 가슴에 남긴다.
그이의 사랑과 고독은 (이 앨범의 숨겨진 걸작인)「겨울나무」에서 겨울나무의 쓸쓸함을 그대로를 조망하는 모습으로 한데 모인다. 겨울나무와 겨울나무의 주변을 살펴보는 그이의 시선에서 우리는 훗날 그이가 마주한 고독과 고독의 풍경을 스케치하는 모습을 잠시 엿볼 수 있다. 풀 냄새가 가득한 이 앨범은 그럼에도 이 땅 위에 디디고 선 방랑자의 삶을 끝내 그린다. 당국이 이 앨범의 진의를 앗아갔어도, 고독의 실체를 온몸으로 겪는 일을 구도라고 표현한 정태춘의 진심만큼은 결코 빼앗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