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48-0-0
「가을 시선」을 먼저 듣는다. 김광민의 재즈 피아노 연주와 한영애의 보컬이 전부인 곡이지만, 뺄 것도 없고, 보탤 것도 없다. 오직 이 둘의 소리만으로 이 곡은 충만하다. 한영애의 노래 속에 깃든 ‘시선’ 속에서 문득 가을햇살이 모든 존재를 담뿍 껴안는다. 이 곡에서 한영애의 목소리는 가지가 넓게 뻗어있는 나이테 많은 나무를 닮았다.
이 앨범은 모든 걸 감싸 안으려 했다. 「가을 시선」이나 「불어오라 바람아」만 그런 게 아니다. (이 앨범에서 가장 실험적인 트랙인) 「감사의 시간」은 (엄밀히 말해 전작의 「조율」과 비슷한 음악적 성격을 공유했지만,) 문명 비판의 관점에서 태초의 해원(解寃)을 기원하는 「조율」과 달리, 자기 자신을 비롯한 모든 생명을 (감사의 마음을 지닌 채로) 있는 그대로 껴안는다.
사실 「가을 시선」과 같은 ‘관조’는 한영애의 기존 앨범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애티튜드였다. 「여울목」과 「건널수 없는 강」의 ‘고독’, 「바라본다」의 ‘선언’, 「말도 안돼」의 ‘절규’엔 늘 한영애의 ‘관조’가 깃들어 있었다. 이 앨범에선 그이의 모든 감정에 (일종의) 심지가 깃들었기에, 그이의 관조 또한 특유의 심지가 두드러졌다.
「불어오라 바람아」와 「가을 시선」을 제외한 모든 곡은 김민기(드럼), 강기영(베이스), 신윤철(기타), 정원영(키보드)의 손길로 더욱 거듭났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의 드럼 ‘사운드’는 기실 샘플링이었다. 「감사의 시간」이 밴드의 실제 연주가 담겼는데도 인공적인 느낌이 살아난 반면, 이 곡의 드럼 사운드는 놀랍게도 들으면 들을수록 실제 연주처럼 들린다.) 이따금 프로듀서인 송홍섭과, 손진태가 기타를 잡기도 했다. 「불어오라 바람아」만 박청귀가 리드 기타 연주를, 배수연이 드럼을, 이태윤이 베이스를, 김광민이 키보드를 각각 맡았다. 당대의 장인 집단이 이룬 이러한 협연 덕분에 이 앨범의 사운드는 더욱 선명하고도 짙은 사색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너의 이름」은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이정선이 제공한 곡이었다. 이 곡은 한영애의 존재감만큼이나, 코러스로 참여한 이정선의 존재감 또한 만만치 않은 곡이다. 정원영의 감각적인 키보드 연주는 곡의 감정에 독특한 잔근육을 부여하며, 곡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앨범의 후반부에 자리한 한영애의 자작곡 세 곡은 사실상 그이의 음악적 관심사가 블루스 장르 하나에만 매몰되지 않았음을 똑똑히 증명했다. 또한 이 앨범이 생각보다 무수한 지층을 지녔다는 점을 더불어 강조했다. 기존의 한영애가 미처 살피지 못한 감정을 다룬 이 세 곡에서 신윤철과 정원영, 강기영과 김민기가 주축이 된 세션은 한영애가 추구하고자 했던 소리에 잘 부합하는 탄탄한 연주로 (전위적인 성격을 담뿍 지닌) 이 세 곡에 음악적 당위성과 (앨범 전체와도 조화롭게 얽히는) 일관성을 한꺼번에 부여했다.
이 앨범에서 그이가 품었던 모든 옹이마다 햇살로 만든 가지가 자란다. 이 앨범이 뿌리내린 대지는 깊고 드넓다. 이 앨범의 가지는 온 하늘을 쉬이 품고, 이 앨범의 뿌리는 온 대지를 힘껏 움켜쥔다. 이 앨범은 한영애 음악의 심처(深處)에 자리한 한 그루의 아름드리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