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내원은 모인 사람들의 얼굴을 눈짓으로 훑어보며 주의사항을 말했다. 더위에 지친 나는 무슨 말을 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했다. 기억 속에서 안내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듯싶다.
“싸우지 마시고 느긋하게 관람하시면 됩니다. 대체로 여기 오시는 분들은 둘 중 하나로 싸웁니다. 사진을 찍는데 남의 얼굴을 함부로 찍었다고 화내거나, 아니면 시원할 거 같아서 왔는데, 그리 시원하지 않아서 화내거나.”
안내원의 말에 모두가 웃었다. 비원(秘苑)으로 향하는 좁은 입구가 저 멀리 창덕궁(昌德宮)에 있던 바람을 모아주는 듯했다. 흐린 날이었고 간간이 비가 내렸다. 땀으로 축축한 팔에 모기 퇴치제 스프레이를 여러 번 뿌렸다. 가을엔 인기가 너무 많으니 이맘때쯤 가자는 내 계획은 처음부터 흔들렸다. 대조전(大造殿)의 담을 끼고 도는 길에 우거진 숲이 그나마 마음을 슬슬 진정시켰다.
사실 계기는 단순했다. 주합루(宙合樓) 사진을 보다가 내가 여태까지 비원(秘苑)을 보지 않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궁궐을 다 둘러봤다고 생각했는데 거길 안 가다니. 그날 부로 바로 예약했다. 일주일 동안 가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쏟아지는 장대비와 습하디 습한 기후가 나를 말렸다. 나는 큰맘 먹고 이온음료 하나를 가방 안에 넣은 채로 여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언덕길을 내려가니 오래된 나무들이 늑재 궁륭처럼 흐린 하늘을 가렸다. 푸른빛으로 물든 길 저 편에 영화당(暎花堂)이 보였다. 사진에서 본 주합루(宙合樓)와 부용정(芙蓉亭)이 바로 왼편에 있었다. 안내원은 잠시 풍경 사진을 찍는 사람들끼리 사진을 찍도록 배려했다. 그다음에야 사람들이 이곳저곳에 들어가 사진을 찍기로 했다.
전각 안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연못을 빙 둘러싸고 사람들이 두리번거리며 핸드폰을 치켜들었다. 어차피 편광필터를 넣을 수 없을 정도로 흐린 날씨라 여긴 나는 그저 풍경을 있는 대로 마구 찍기 바빴다. 사진을 찍는 내내, 흐린 날에 찍은 사진일수록 건물의 색이 사진에 더 잘 드러난다고 말한 어느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잠시 쉬고 있노라니 안내원이 저쪽에서 다가왔다. 나는 그이와 더불어 몇 마디를 나눴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저마다 오는 사람들끼리 제각각이라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나무그늘의 푸른 그늘이 어두운 흙길에 약간 스며들었다. 사람들이 더 이상 핸드폰을 들고 있지 않고 두리번거릴 즈음에 안내원이 이들을 불렀다. (이곳에 유일하게 있는) 화장실이나 휴게실에 있던 사람들도 나왔다. 산비탈과 담장 사이로 휘우듬하게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길섶에 핀 꽃은 울창한 숲의 그늘에 잠시 표정을 숨기는 듯 했다.
금마문(金馬門)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돌로 된 불로문(不老門) 앞에서 서성이던 사람들이 애련지(愛蓮池)의 사진을 찍는 동안, 나는 애련정(愛蓮亭) 한편에 있는 희고 노란 점을 보았다. 고양이가 웅크려 앉은 채로 입천장이 다 보일 정도로 하품했다. 사람들이 고양이가 있다고 소리치는 동안 안내원은 태연한 말씨로 고양이를 아꼈다는 숙종(肅宗)의 이야기를 꺼냈다. 야생이라고 듣기는 했지만, 고양이는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소리도 아랑곳없다는 듯이 오수(午睡)에 빠졌다. 길은 아직 절반도 채 지나지 않았기에,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곧장 가던 길을 마저 걸어갔다.
길쭉한 가지 모양처럼 생긴 호수가 나왔다. 저 멀리 정자와 전각이 이리저리 흩어져있었다. 관람정(觀纜亭) 곁에 있는 연못물은 초록빛을 머금은 흙빛이 승했다. 나무 사이로 자귀꽃이 희끗희끗한 뺨을 드러내는 동안, 축축한 바람이 사람들 사이사이로 느릿느릿 지나갔다. 저 멀리서 안내원이 자기를 따라 오라며 손짓했다. 나는 잰걸음으로 그쪽에 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