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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의 명상

by GIMIN

식사는 1인분 만드는 게 힘들다. 2인분은 도리어 쉽다. 재료 준비하는 즐거움도 있고, 요리를 하는 즐거움도 있으니까. 1인분의 재료를 잡는 일은 차라리 소꿉장난 같다. 누군가에게 대접하지 않고 자기 식사를 만드는 일임에도 그렇다.


볶음밥을 예로 들어볼까. 생각보다 밥을 적게 잡아야 재료와 밥의 함량이 균등하게 되고 색도 좋아지며 간도 잘 된다. 명색이 밥인데 재료한테 양을 뺏기는 느낌이다. 밥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이 정도 손실도 너무 크다. 1인분은 재료와 다투는 게 아니다. 1인분은 내 욕심과 대결해야 한다.


우리네 세상의 어디선가, 인덕션이나 가스레인지나 간이 가스버너 위에 라면이 끓고 있다. 그리고 한 젓가락만 들고 싶은 사람도 릴레이 경주의 주자처럼 끊이지 않을 것이다. 각자의 레시피는 다르지만, 라면은 양적인 측면에서는 완벽한 식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 봉지의 라면은 완벽한 1인분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적게 먹든, 더 먹든 상관없다. 밥을 말든 안 말아먹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1인분의 기준을 라면은 칼 같이 정해놨다는 것이다.


고깃집이나 식당에서 1인분의 주문을 잘 받지 않는 이유는 음식의 양과 음식이 가져오는 이익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품이 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서울식 육수 불고기를 뚝배기에 담는 뚝배기 불고기로 만드는 해결책도 왕왕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불판에 구워 먹는 삼겹살을 혼자 먹는 일은 별로 없다. 설사 인심 많은 주인이 혼자 삼겹살을 먹는 것을 허용해도, 주인의 가게에는 늘 2인분 이상 주문 가능이라고 써진 메뉴판이 붙어 있을 것이다.


2인분을 1인분으로 줄여서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접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불을 더 많이 접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과 같아서, 드는 힘에 비해 초라한 결과물이 눈앞에 드러나면 분통부터 터트리는 것이다. 이까짓 거에 그렇게 힘들게 매달릴 일이냐고 허공에 대고 삿대질할 것이다.


1인분의 야채를 사는 일은 더 힘겹다. 2인분 기준이면 사나흘은 먹을 양이 1인분 기준이면 순식간에 일주일 이상에 걸쳐 먹을 양으로 늘어난다. 그 사이에 야채는 시들고, 눅눅해지며 최악의 경우 부패하기도 한다. 시든 양상추를 보고도 더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 양상추는 통째로 끝이다. 거기서 오는 자괴감 또한 쏠쏠한데, 1인분으로 팩에 담아 파는 야채는 비싸고, 쓰레기가 많다. 지금 내가 짊어지고 있는 서류들(단순히 종이에 써진 서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에 ‘야채를 오래도록 보관하는 방법’이 담긴 바인더 하나가 더 오른다면 나는 쓰러질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1인분은 사수해야 하는 영역으로 남는다. 나의 욕망과 건강을 챙기는 일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1인분조차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올해 들어 자주 오는 더위, 이상한 기후, 불안정한 대기와 생태계가 그걸 표현하고 있다. 두 손으로 양 귀를 닫아도, 보이지 않게 눈을 손으로 가려도 이상현상은 지금 우리의 목덜미를 짓누른다. 그러나 풍요라는 환상에 집착하지 말고 자연인으로 돌아가라는 외침은 공허하거니와 실천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음식은 1인분을 사수하기 어려울지언정, 한 명의 어엿한 사람이고 싶은 바람은 스무 살이 훨씬 넘은 지금에도 내 큰 목표다. 어딘가에 존재할 남의 1인분을 지키기 위해, 내 몫을 지키면서도, 천천히 욕망만을 더는 연습을 지금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그릇된 생각을 빚어 그릇으로 만드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강사도 수강생도 나 혼자인 조용한 명상 프로그램이다.(2024.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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