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이 모두 예민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자정을 넘어서도 잠 못 이룰 때면, 글 쓰는 사람이 예민한 사람이라는 편견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잠들고 싶은데 정신이 커피 마신 직후처럼 또렷할 때가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한 편의 글을 완성했을 때 느낀 환희가 잦아드는 시간이 오래 걸리다 보니 잠 못 드는 일이 많다.
그러나 원인을 모르는 채로 잠 못 들 때가 있다. 컴퓨터를 끄고 침대에 누웠는데도, 이마 위는 맑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또렷하다. 내가 떠올린 기억이 비현실적인 상황이 되어 꿈으로 들어가는 흔적조차 없다.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거나 동영상을 봐도 이 각성 상태는 영 잦아들지 않는다.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잠을 찾아 뒤척이다가 새벽을 맞이한 일이 있었다. 어두운 방에 드리운 불빛이 점차 형체를 잃고, 컴컴하기 이를 데 없던 방이 옅은 푸른빛으로 젖을 때, 창 밖엔 새소리가 들렸다. 자기네는 높이 날아오르면서 떠오르는 해를 먼저 볼 테니까.
가로등이 꺼지면서 방안이 약간 어두워지는 일도 잠시, 태양이 모든 빛을 한데 끌어모아 천장과 내 허벅지와 이불 위에 뜨듯한 빛을 던지면, 내가 밤새 궁리했던 모든 잡생각은 마치 물에 오래도록 푼 빵처럼 흐물흐물하게 녹기 바빴다. 나는 대체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했을까. 밤에 한 잡생각을 당장 내가 결재해야 할 서류나 업무와 같은 무게를 지닌 일로 여기다니.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동이 트고, 아침이 밝는다.
수면유도제를 비롯한 걸 고민도 해보았지만, 의사는 스트레스를 줄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안녕하세요’나, ‘오늘은 어떤 일로 오셨나요’와 같은 뉘앙스의 말을 내가 굳이 돈 줘가면서까지 들어야 하는지 회의감도 들었다. 의사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밤은 푹 자긴 했다. 그러나 곧바로 정말 잠 한숨 못 잘 때가 찾아왔다.
새벽 4시만 되면 망치로 못을 박는 집이 있는 모양인지, 나무에 대고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적도 있었다. 근처에서 공사를 한다는 안내문을 엘리베이터 유리 옆에서 봤지만, 그걸 일주일 내내 듣는 일은 고역 그 자체였다. 그 시간 이전에 까무룩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잠을 방해했다.
운동 삼아 장거리를 걷고 마치고 돌아온 어느 토요일, 나는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잠은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여덟 시간을 내리 잔 나는 오늘이 월요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나는 일요일 아침을 남들과는 다른 다소 이른 시간에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일요일 오전은 피곤한 몸을 가누며 보내야만 했다.
몸도 마음도 잠을 다스리지 못할 때마다 글을 썼다. 글을 쓰고 난 뒤에 느끼는 뿌듯함과 글을 쓴 뒤에 고치고 싶은 부분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자면서도 천장에 종이가 보이고 내가 고치고 싶은 문장이 보인다. 어쩔 수 없이 컴퓨터를 켠다. 아까 쓴 글보다 훨씬 좋은 문장이 채워진다. 낚시터에서 졸음을 쫓으며 물고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이런 마음이려나.
잠을 줄이며 글을 쓰는 일은 몸에 해롭다. 잠과 싸우는 나는 결국 글과 싸우는 셈이다. 이 싸움의 끝을 모르니 잠 또한 잘 모르겠다. 끝없는 이야기에 대한 환상은 기실 끝없는 잠의 관점에서 본 삶이 아닐까. 재밌는 생각이다. 그러나 잠을 못 잔 나는 그걸 즐길 여력이 없다.
내가 쓴 이야기를 내가 즐길 여력이 되지 않으면 자야 한다. 최근에 내가 고안한 회로 차단기 스위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