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하는 순간 '결정'된다는 것의 의미
과알못의 양자역학 이중 슬릿 실험에 대한 고찰
우리의 삶. 우리가 사는 세계는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단순한 호기심에 찾아본 방대하고 심오한 내용에 빠져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들도 명확하게 결론 내리지 못한 이 우주 질서의 법칙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이해한 내용을 적어보기로 했다.
인간이 무수한 수의 체세포로 이루어져 있듯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를 양자라고 칭하고 양자를 한 개씩 발사하는 실험체를 만들어 벽에다 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양자가 벽에 닿기 전에 통과하는 틈을 슬릿(slit, 좁고 긴 트임)이라고 하는데 슬릿이 하나일 때는 발사된 양자가 그대로 벽에 가서 붙어서 일정한 무늬를 만들었는데, 슬릿을 두 개를 만들었을 때 그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당연히 두 개의 슬릿을 통과했으니 결과가 두 개의 띠무늬로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을 깨고 여러 줄의 간섭무늬가 나타난 것. 양자를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한 개씩 발사했는데도 하나의 양자가 갑자기 두 개로 갈라져 두 개의 슬릿을 모두 통과한 것 같은 결과(입자를 쏘았는데 파동이 닿은 듯한 무늬)가 나왔다는 것이다. 맙소사. 양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단위인데. 그래서 관찰 장치를 놓고 관찰을 시도했더니 마치 자신이 관찰당하는 것을 알고 있는 냥, 다시 입자로서의 성질을 가지고 두 개의 슬릿을 통과한 모습 그대로 두줄의 통과 무늬를 나타냈다고 한다.
이 실험과 관련하여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론이 나왔는데 내용은 상자에 고양이를 가두고 1시간 후 50퍼센트의 확률로 독약병이 깨지게 설계한 후 1시간이 지났다고 가정했을 때, 고양이는 살았거나 죽었거나 두 가지 가능성이 모두 존재하지만 실제 상자 속 고양이는 살았던지 죽어있지 두 가지 상태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가능성은 열려있고 그것이 관찰자에 의해 관찰될 때 결과가 정해진다는 것이다.
미시적 세계와 거시적 세계.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이 가시의 세계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지금의 내 모습도 어쩌면 수많은 파동 중의 하나일까? 양자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눈앞에 빨간 장미꽃 한 송이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내 눈으로 바라본ㅡ수정체를 거쳐 뇌에 이미지로 각인되는ㅡ꽃과 강아지가 보는 꽃, 카멜레온이 보는 꽃, 파리나 잠자리가 보는 꽃은 모두 다른 모습일 것이다. 모두 관찰 가능한(식별할 수 있는) 색과 시야각이 다르니까. 박쥐나 돌고래같이 초저주파, 고주파를 감지하는 동물들은 같은 장소에서 듣는 같은 소리도 나와는 다르게 들릴 텐데. 아, 이래서 옛 성현들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하셨던 건가.
어쩌면 내 영혼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고 이 육체를 가지고 움직여 생을 이어가는 것이 매 순간 세계를 관찰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주말 당직을 서고 월요일 아침에 퇴근했더니 큰아이가 나를 반기며 어린이집 안 가고 엄마하고 놀고 싶다고 해서 아쿠아리움에 데려간 적이 있었는데 새벽에 쪽잠을 자 피곤한 상태에서 수족관 안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멍하니 보다가 몇 초간 내가 물고기를 바라보는지, 물고기가 나인데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순간 그(?)와 나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의식이 흐릿해지다가 번쩍 정신을 차린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소(02)가 탄소(C)를 만나 이산화탄소(CO2)도 되고 수소(H)를 만나 물(H2O)도 되는 것처럼 인간도 수많은 체세포의 복잡한 결합일 텐데, 어쩌면 세포 결합에 따라 내 육신이 물고기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과학 문외한이니 할 수 있는 엉뚱한 상상이겠지만.
'현상'이란 물질들이 시ㆍ청각 등 오감정보를 통해 인식되는 일이고 그것이 어떤 '결과'값을 갖게 될지는 관찰자인 나로 인해 결정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으니, 이제 나는 살면서 선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더 고민하고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