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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Dec 17. 2021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어두운 밤에도 빛을 잃지 않도록

올해 마지막 당직을 섰다. 별일이 없으면 짬을 내서 다음 달 칼럼 기고를 위해 생각해 둔 주제인 신변보호에 대한 자료들을 좀 찾아보려고 했었는데 날씨도 좋고 주말 저녁도 아니었는데도 신고가 많았다. 우리서 허위(피해망상) 신고 지분율 압도적 1위에 빛나는 단골께서 집전화, 휴대폰 등등 번호를 바꿔가며 상황실과 112로 전자파 쏘는 것좀 막아달라며 100통이 넘게 전화를 걸어댔고 도로에 추락한 적재물 및 고라니 사체 등으로 인한 위험방지 신고, 실종(자살시도 전력이 있는 사람이었음) 신고, 돈사 1동이 불타 돼지 500여 마리가 폐사한 화재신고 등. 그 와중에 술 먹고 난동 부리는 방문민원까지 있어서 마음 놓고 의자에 앉아있을 틈도 별로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경찰서에서 주취소란이라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화가 났다. 자정이 다될 때쯤 후반 당직자분이 정시보다 일찍 오셔서 이른 교대를 하고도 내내 고라니, 화재, 자살의심, 주취소란의 잔상이 남아 마음이 불편했다. 민원실 근무는 확실히 민원응대가 주로 서류 위주의 행정업무다 보니 상황실(당직근무)의 현장감이 덜한 편이라 잠시 잊고 살았던 것을 다시 깨닫게 된 듯했다. 내가 폭신한 침대에 누워 하루를 마무리하며 잠을 청하던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어두운 현실을.

당직근무 후 다음날은 대체휴무라 아이들 어린이집 보내고 개인적인 볼일을 봤다. 대강 집 청소하고 간단히 밥 차려 먹고 씻고 나와서 집 앞 미용실에 들러 커트하고 소액이지만 후원하고 있는 아이가 있는 곳을 찾아가 크리스마스 선물 겸 양말을 선물하고 왔다. 우리 집 근처 영아원에서 지내는 우리 딸 또래 남자아이인데(친모가 정신질환이 있어 아동학대 관련해서 보호 중이라 얼굴 사진도 가린 채로 보내주셔서 사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이나 딴에는 숨겨놓은 아들처럼 마음이 쓰여 가끔 영아원 홈페이지 들어가서 모자이크 사진이나마 어떻게 지내는지 들여다보곤 했다) 내가 그리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마음만이라도 닿았으면 해서 축복의 메시지를 담은 짧은 문구를 넣고 스티커를 붙여 영아원에 있는 친구들 수만큼 미리 주문해 둔 양말 한 박스를 직원분께 드리고 왔다. 거창한 선물도 아니고 집에 있던 물티슈 박스에 포개 넣어 사이즈와 수량을 겉면에 네임펜으로 적은, 작고 보잘것없는 상자를 받아 드신 채로 서서 나와 남편이 탄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갈 때까지 눈으로 배웅하시던 영아원 선생님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선물한 양말을 신고 있는 아이 사진과 함께 감사인사를 담은 문자가 와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춥고 어둡고 험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다시 환한 빛으로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초라한 선물을 위대한 의미로 받아주신 그분의 마음씨가 새삼 따듯하게 느껴졌다.

'작은 빛이 큰 어둠을 이긴다'는 말처럼, 어쩌면 작은 사랑이 큰 미움도 분노도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 현실이 쓰러질 듯이 위태롭고 힘겨워도 실낱같은 희망 하나가 다시 박차고 일어날 힘을 주듯이. 특히 우리 아이들에게는 좀 더 나은,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도록 작지만 밝은 빛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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