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새로 장만한 종이 다이어리에는 왠지 개인적인 감정의 나열은 잘 안 하게 된다. 객관적으로 겪은 사실들이나 스케줄을 기록하고 있다. 늘 갖고 다니는 다이어리라 혹시라도 어딘가에 두고 오게 되면 낯선 누군가 내 마음을 들여다볼까 봐 싫기도 하다. (안 잃어버리면 되는데…) 지금은 거의 스케줄러 용도인 듯. 그곳엔 들킬까 두려운 언어로 감정을 표현하기보단 용기를 갖고 드로잉을 하는 게 낫겠다. 유일하게 글로써 하는 감정 분출이 허용된 다이어리는 쓴 지 1년 넘은 모닝페이지용 다이어리. 왜 써도 써도 페이지가 한참 남은 것만 같지… 다음번에 살 땐 좀 덜 두꺼운 걸로 구입해야겠다.
극기훈련 비슷하게 감정을 컨트롤하면 또 모르겠는데 요즘은 그냥 안 좋은 감정들에 푹 담가져 지낼 때가 많았다. 빨리 바빠지고 싶고 하려는 일을 시작하고 싶다. 그렇게 일로 도망치지 않으면 자꾸만 내 안의 문제에 빠지고 더 깊이 집중하게 되는 거 같아서. 일로 회피하는 거라 해도 이젠 아무 상관이 없다. 한때는 나 자체의 나로 만족하길 소망했지만,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의 내가 완전하길 바라는 게 지금으로선 어불성설이라는 걸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강하지 않다 난.
요즘의 유일한 낙이라면 퇴근한 남편이랑 이른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만들어 먹는 것, 그리고 딱 3일 전부터 요가매트 사서 집에서 시작한 스트레칭,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 따라 저절로 잠에서 깼다가 남편 출근하면 보충하는 꿀 같은 두세 시간의 잠.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는데 몇 주째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이 분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화가 근육 사이사이에 쌓여서 그대로 굳어진 것 같아 몸 쓰는 스트레칭을 시작했더니 즉각적으로 막힌 부위들이 시원해져서 중독성이 있다.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다 적으로 만들어준 엄마라는 존재에게 이제는 어떤 감정을 품어야 하는 건지, 지독한 나르시시스트인 당신에게 품는 양가감정 덕에 매일이 악몽 같았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유튜브 영상도 찾아보고, 내가 당신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조차 당신에겐 흥미로울 거라 생각하니 어떤 반응도 당신 앞에서는 티 내기가 싫다. 당신은 이런 나를 못됐다고 하고 다녔겠지, 그러니 당신 주변의 내 형제와 친척 등 모든 사람들도 나와 멀어진 걸 테고. 그런데 그거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 당신이 늘 나에게 그 사람들 욕을 엄청 해댔다는 거. 나한텐 감정 분풀이를 다 해놓고서 다시 그들을 당신 편으로 만들어 지지를 얻고 나를 배척하고 있다. 그런데 이젠 이런 거에 신경 쓰는 것도 다 의미 없게 느껴진다.
나는 그들에게 나의 이유를 설명해야 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그들을 위한 배려였을 거 같아. 하지만 그 당시엔 모든 걸 포기하고만 싶었다. 모든 게 무기력했고 의미 없이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도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사람은 없을 거야. 당신이 다 나의 적으로 만들었을 테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이 분노는 언제 사그라들지. 마음의 병이 깊어진다.
이제는 안다. 내가 당신의 무엇 때문에 힘이 든 건지, 당신을 마음으로 가까이할 수 없는지. 명확히 그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 고통을 망각하는 건 본능일지라도 잊어선 안 되는 것들이 있는 거다. 당신은 나의 삶의 주도권을 언제나 빼앗으려 했다. 그것은 아직도 이어지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당신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나는 당신에게서 멀리멀리 도망쳐서 나를 지켜야 한다. 나는 통제당하고 싶지 않다.
하고 싶은 게 참 많았는데 뭔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언제나 한정되어 있었다. 날 힘들게 하는 것들에서 신경 끄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완전히 자유로워져서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더 의욕적이게 된다면 하고 바라지만 그건 지금으로선 다음 문제다. 의외로 한정된 시간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의 양과 질이 문제인 듯하다.
진심으로 서로를 응원하는 내 곁의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를 괴롭히는 안 좋은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하루하루 노력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