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엔 아무것도 못한 채 5일 정도를 보냈다. 무기력 끝판왕을 달리며 침대와 한 몸이 되어 두려움과 불안에 떨었던 끔찍했던 나날들이었다. 심리적 증상이 신체화가 되어 둘째 날엔 또다시 전처럼 몸 전체 왼쪽이 저릿저릿한 신경통을 겪고 4일째 되던 날엔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과 주먹 반만 한 돌멩이로 누군가 자꾸 오른쪽 머리를 치는 기분을 느끼며 잠에서 깨고 또 잠이 들었다. 아침이 오는 게 끔찍하고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절망스러웠던 나날들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몸과 마음의 고통을 겪으며 가까운 미래조차 보이지 않던 것이, 어제의 상담치료를 계기로 상태가 놀랍도록 호전되었다. 일단 내 마음을 솔직하게 마주했고 내가 현재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하지도 못할 일들을 계속 떠올리면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압박감, 도리, 죄책감에 휩싸여 있었고 평소에 하던 일상적인 일들을 하지 못했다. 샤워를 겨우 했으니,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건 꿈도 못 꾸었다. 학원 개원 준비에 대한 최소한의 것들을 하는 것조차 괴로웠기 때문에 을지로에 목공소를 들러 견적을 내는 일 같은 건 무리였다.
그런데 어떻게 단 한 번의 상담 이후에 이렇게 용기를 갖고 일상을 살아낼 수 있게 된 걸까. 지금까지의 상담에서 늘 솔직하게 내 마음을 드러냈지만 어제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확신조차 없었다. 해결책도 없을 것이고 선생님도 나에게 더 큰 죄의식을 심어주는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여 상담을 미룰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상담을 가기 전까지 나는 이번 일로는 단 한 번도 맘 놓고 울지도 못했던 것 같다. 울 자격도 없다고 느껴졌다. 그런데 저번주에 이 일이 있은 후 처음으로 꺼이꺼이 울었다. 선생님은 나를 판단하지 않으셨다. 상대가 말하고 사회가 말하고 내 안의 목소리가 말하는 기본 된 도리를 할 수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온몸이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부에는 온당한 이유가 있었다. 괜히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다 잊고(나는 내가 부당하게 겪은 일에 대해 시간이 지나면 잘 잊어버린다. 그래서 너무 쉽게 용서하고 또다시 손해를 보기에 더 기록하려고 하기도 한다. 마치 그 일을 겪으면서 들어간 감정적 소모가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아 재빨리 잊어버리는 것 같다.) 또다시 내 도리를 하기 위해 그 굴레로 들어간다면, 내가 머리로는 잊어버린 그 굴욕적인 게임판 속으로 스스로 다시 들어가는 셈이 되어버린다고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 고통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다, 안 그래도 된다, 나 스스로를 가장 먼저 지켜야 한다, 수없이 들었던 말들도 막상 실행하려니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학대를 받고도 금세 잊어버리고 스스로 성실한 일꾼을 자처하는 노예처럼 말이다.
나는 내 마음을 살찌우고, 건강하게 만들 권리가 있다. 그 시간 동안 상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 이제는 조급하게 겁을 먹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감정적 가스라이팅에 또다시 무너지지 않아도 된다. 상대는 어차피 내 덕분에 행복하지 않다. 나 때문에 불행하다고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영원히 채워줄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하자. 내가 여태까지 겪은 것을 바보같이 잊어버리지 말자. 아니, 바보 같다는 자책도 그만하자. 내 탓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잘 살자.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은 그다음이다. 내 마음부터 편안해지자. 내가 바라는 것은 온전한 마음의 나이다. 강압과 통제의 굴레에 들어가 자유를 착취당하는 내 모습이 아니다. 또다시 굴복하는 내가 아니다. 나는 한 톨의 억압도 허용하지 않을 거다. 불행의 원인을 나에게 돌리는 그 태도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 굴레를 끊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세우는 견고한 경계이다. 내 마음의 수용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알았고, 나는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고 행하면 된다. 상대의 감정은 내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