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에 남편은 다니던 회사를 정리했습니다.
남편의 자의보다는 타의(저의 권유)가 더 컸습니다.
쉼없이 일한 남편의 건강과 휴식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에 10년동안 두 아이를 엄마가 키웠으니 이제는 남편이 3년정도는 아이들을 키워야한다는 뜻이 담겨있었죠. 사실 권유라기 보다는 협박(?)에 더 가깝네요.
돈 걱정을 하는 남편에게는 이번엔 내가 돈을 벌겠다고 했더니 자신만큼 벌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남편이 돈을 버는 것에는 내가 가사일과 육아를 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며 10년동안 주부로 살았는데 사회에서 얼마나 주겠냐고 했더니 그냥 아껴쓰면서 버텨보자는 결론을 내리더군요.
사실 남편은 아이들과 혼자 있는 것, 40대 남자가 혼자서 다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정리
할 수 있느 것은 정리해서 쓸 수 있는 돈으로 만들고 버텨보기로 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닙니다.
예전부터 결혼 생활을 하며서 고민했었고 10년정도가 되면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
분명 우리는 서로 사랑해서 결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았는데 자녀 교육에 대한 책임이 아내에게 많다는 건
불공평하다는 것이었죠. 남편은 직장을 다녀서 주말에나 아이를 볼 수 있는데 아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성향을 갖고 있는지 고민해 볼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겠죠.
아이들이 함께 있고 싶어할 때 같이 있어줘야지 아이가 좀 더 커서 중고등학생이 되면 부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같이 있으려 하는 건 소용이 없으니까요. 3년이라는 공백이 직장인에게는 두렵겠지만 모든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듯이 아빠의 역할 또한 지금이 더 중요하다는 걸 설명했습니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는 두려움도 있지만 이걸 계기로 소비에 대한 좋은 습관이 생길 수 있으니 더 좋죠.
초등학생인 아이들은 아빠가 회사를 안간다고 걱정하는 것보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진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에 부부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봤습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배우기 위해서 주민센터 프로그램을 이용하기로 했죠.
그중에서 남편과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찾다가 오카리나를 신청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오카리나 수업이 있어서 샀던 것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했죠.)
수강료는 3개월에 3만원, 악기 비용은 제로
<학교에서 사용한 플라스틱 오카리나>
<도자기로 만든 오카리나>
오카리나 수업 첫 날.
대부분이 젊은(?) 할머니들이셨고 한두 명정도는 은퇴하신 할아버지였고 40대는 저희 남편 혼자였습니다.
선생님은 꽃 그림으로 장식한 예쁜 오카리나를 들고 계셨고 주변분들은 도자기로 만든 오카리나를 들고 계셨죠. 그 가운데 남편과 제가 핑크색과 파랑색 오카리나를 들고 있었습니다.
안그래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목을 받는데 플라스틱으로 만든 오카리나를 든 40대 부부라....
사실 좀 부끄러웠지만 우리에겐 아껴야할 이유가 있었음으로 창피함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운지법을 배우고 '나비야 나비야'부터 한 곡씩 연주를 반복했습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은 있지만 2시간 동안 연주를 하다보니까 소리가 이상해지다가 나중에는 잘 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 플라스틱 오카리나로 오랜시간 연주하는 건 무리가 있다고 하셨죠. 연주하면서 생기는 침
고임현상이 도자기에 비해서 플라스틱이 심하다고 말이죠.
(우리가 초등학교 때 리코더 연습할 때도 침을 빼느라고 바빴던 게 생각나네요.)
오카리나는 공명이 중요한데 플라스틱 오카리나에서는 좋은 음색이 잘 나오는 데는 무리가 있다구요.
남편과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으니까요. 고민 끝에 제대로 배우자며 도자기
오카리나를 구매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도자기 오카리나로 연주하면 더 잘 할 연주할 수 있으니까
라고 합리화하면서..)
도자기 오카리나는 색이 똑같아서 구별을 해야 된다며 뒤에다가 이름을 붙이더군요.
(뽀뽀도 하는 사이면서 구분짓기는... 참 뽀뽀 안하고 사는구나...)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다녔고 마지막 발표회 시간에 둘이 오카리나 연주를 했습니다.
오카리나의 시작으로 펜플룻을 알게 되었죠. 어느 날 책장 사이에서 못보던 악기를 발견했습니다.
꺼내 보니 플라스틱 펜플룻이었죠. 처음엔 멋쩍어 하더니 연주를 하는데 영~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원래 오카리나를 배울 때부터 나중에 팬플룻을 연주하겠다고 결심을 했다는데 오카리나 연주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음의 위치를 익혀야하고 손으로 떨어주면서 음색을 다양하게 해야하거든요.
남편은 핸드폰 벨소리도 엘 콘도르 파사(El condor pasa)로 바꾸고 안되는 팬플룻을 자꾸 연주하는 거에요.
아무래도 제가 사라고 강요를 하는 것 같았죠. (본인이 산다고 하면 될 것을...)
결국은 제가 제대로 된 팬플룻을 사면 연주를 잘 할거라면서 큰 결심을 하고 주문하면 대나무로 만들어주는
팬플룻을 구매했습니다.
남편이 직장에 다닐 때는 자신을 위한 취미생활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줄만 알았지 쓸줄은 몰랐죠.
물론 지금 상황에서 지출이 많이 부담되지만 음악에 대한 남편의 생각은 진심이고 지금 시간이 주어졌으니까 해야죠. 얼마나 좋은지 팬플룻 가방에서 꺼낼때도 조심해서 꺼내더군요.
남편과 제가 악기를 배우면서 가족이 각자에 맞는 악기를 배워서 나중에 가족밴드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마침 주변에 저렴한 실용음악학원을 찾게 되었고 남편과 첫째 아이는 드럼, 기타를 저와 둘째 아이는 기타를 배웠습니다. 남편이 드럼 연습을 하는데 옆에 있어보니까 또 다른 모습의 남편으로 보였습니다. 못치는 모습을 볼 때는 우스웠지만 익숙해져서 한 곡을 다 연주할 때는 멋있더군요.
아쉬운 점은 악기가 좀 오래되어서 소리가 좋지는 않다는...
드럼 스틱을 보면 연습한 흔적이 보이시죠?
딸 아이의 생일이 다가오면서 기타를 선물하기로 했습니다. (그동안은 실용음악학원에 있는 기타로 연습을 했거든요.) 사실 목적은 제가 기타를 갖고 싶었거든요. 선물은 해주고 제가 빌려서 연주하면 좋잖아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피아노 학원을 다녔구요. 저는 결혼하고 나서 피아노를 배웠고 생일 선물로 디지털피아노를 선물 받았어요. 아이들한테 피아노 학원에서만 연습하지 말고 집에서도 연습하라고 했는데 잘 안하더라구요. 나중에 알았는데 업라이트 피아노랑 디지털피아노랑 건반을 누르는 느낌이 다르다는 걸 알았죠. 아이들이 피아노에 대해서 점점 알아가면서 차이점을 몸으로 느낀거에요. 저는 피아노에 대해서
잘 몰랐으니...
기타를 배우면서 우리가 좋아했던 노래들을 아이들에게 들려주었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손이 굳어서 그런지 기타 코드를 잡는게 참 힘들었는데 손이 작은데도 코드를 잘 잡고 연주하더군요. 맨날 애들한테 모른다고 뭐라고 했던 아빠가 아이들한테 물어보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도 재미있었구요.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지 1년이 지나면서 코로나가 시작됐죠. 코로나 기간이 이렇게 길어질 줄도 몰랐죠.
학원은 다니기가 어려워졌고 집에서 연습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코로나 확진자들이 주변에 많아졌고 결국 우리 가족도 모두 코로나에 걸렸구요.
사실 코로나 시기에 음악인들이 많이 힘들어하셨죠.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공연 취소로 인해서.)
음악인들이 동영상으로 연주하시는 걸 올려놓으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음악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구요. 그때 이런 생각을 잠시 해봤습니다. 우리 가족이 코로나 밴드를 결성해서 코로나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구요. 음악이라는 건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마법같잖아요. 생각해보니까 수많은 전쟁 속에서도 음악은 살아있었죠.
코로나 기간이 길어지면서 우리 가족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중학생이 된 아이들은 공부가 우선시되었고 직장인이 된 남편은 업무에 충실했고 저 역시도 주부의 생활을 하면서 악기와는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하면서 악기와 보냈던 시간들은 잊지 못할 거에요. 우리가 다시 함께 악기를 연주하게 될 때는 '코로나 밴드'라고 이름을 붙일 겁니다. 코로나 시기에 우리는 악기를 만났으니까요.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겠죠?
실력은 아마추어지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프로라고 말이죠.
(그러고보니 저만 혼자 생각했네요. 가족들에게 물어봐야겠죠?)
코로나 시기에 힘들었던 부분들은 코로나가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아마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거에요. 아무런 준비도 없었으니까요. 우리밖에 모르던 사람들에게 가족과 자연이 함께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 점에서는 코로나가 고마운 부분도 있네요. 저는 사진 찍으면서 이 악기들의 존재를 다시 실감했고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드네요. (그래도 저는 가끔씩 연주는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