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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um Aug 25. 2019

파리는 날마다 숙제

노르망디 지방에 있는 루앙Rouen에 다녀왔어요. 높고 커다란 모네의 성당(루앙 대성당)과 아름다운 구시가지를 천천히 걸었죠. 풍경에 감탄하며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연이어 찍다가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 파리에 1년 넘게 살면서 내가 사는 도시의 풍경을 찍은 적이 거의 없네… 지금처럼 들뜬 기분으로 거리를 천천히 걸은 적도 없구나.


⁣⁣파리에 도착한 후 반년 동안은 사진을 찍을 수 없는 날들이었어요. 불어를 1도 못했던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앞으로 살아갈 집을 구해야 했구, 은행 계좌를 여는 일부터 체류증을 갱신하는 일까지 모두 험난한 과업이었죠. 어느 날에는 사기꾼 만나 경찰 부르고, 어떤 날에는 아파서 병원 가고, 다른 날에는 소매치기에게 가방 털렸다 다시 찾고… 담배 피우는 속도가 빨라졌고 인종차별을 포함해 더러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어머나 시발 욕설도 존나 늘었답니다. 에펠탑은 그저 철골로만 보였지요.


따귀를 후려 맞은 듯한 강렬한 첫 만남 이후 파리 생활은 천천히 안정됐고 제 얼굴도 점점 두꺼워져, 어느덧 저는 한국인을 찾아보기 힘든 우리 동네에서 장도 (한국어로) 보고 은행 업무도 (모국어로) 해결하고 취객이랑 (우리말로) 대화하고 쓰레기에게 (공용어로) 지랄하고… 읭? 아무튼 여전히 불어는 1도 못하지만 잘 지내게 됐어요. 에펠탑이 예쁘다고 생각할 수도, 영화도 전시회도 볼 수 있었죠. 그래도 오랫동안 파리의 사진을 찍지 않았답니다. 찍기를 주저했어요.⁣⁣


아름다운 풍경 말고도 수많은 장면들이 제 마음을 건드렸기 때문이에요. 순환도로 한 켠에 낙엽더미처럼 모여있던 난민 텐트, 넘쳐나는 공유경제 또는 플랫폼 자본주의, 노골적이거나 정교한 인종차별… 모르는 이야기가 얼마나 더 많을 것인지. 헤밍웨이가 “파리는 날마다 축제”라고 말했지만 축제는 개뿔, 제게 파리는 날마다 숙제였어요.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 몰라 길을 잃었던… 그동안의 제가 조금 안쓰러워졌습니다. 다시 파리로 돌아온 저는 길 잃었던 제게 어떤 문장을 읽어주기로 했어요. 내 삶의 크기가 작더라도… 내 좁은 동선 안에도… 나의 이야기가… 로 끝나는 글을.⁣⁣


⁣⁣“열차는 눈먼 물고기처럼 인천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노선도를 올려다보며 역사(驛舍)의 수를 꼽아보았다. 인천에서 의정부까지 50여 개의 역이 있고, 영등포와 신길, 종로를 지나면 서울 북쪽 어딘가에 내 방이 있다. 노선도의 불빛이 깜빡거렸다. 자그마한 플라스틱 전구 위로 종착역까지는 녹색 불이, 이미 지나간 역 위로는 빨간 불이 켜졌다. 도시의 이름을 가진 점과 그 사이를 잇는 직선, 나는 그것이 카시오페이아나 페르세우스, 안드로메다라 불리는 이국 말로 된 성좌처럼 어렵고 낯설었다. 내가 모르는 도시의 별자리. 서울의 손금. 서울에 온 지 7년이 다 돼가는데, 그중에는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동네가 많다. 땅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안내 방송을 들을 때마다 나는 구파발에도, 수색에도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서울의 크기가 컸던 탓이 아니라, 내 삶의 크기가 작았던 탓이리라. 하지만 모든 별자리에 깃든 이야기처럼, 그 이름처럼, 내 좁은 동선 안에도- 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김애란, 자오선을 지나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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