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와 내리 사흘 잠을 자고 또 잤습니다. 꿈에 서울의 사람들이 연이어 나왔어요. 이번 여행에서 반갑게 만나거나, 아쉽게 만나지 못하거나, 혹은 이제 더이상 만날 수 없게 돼버린 사람들이. 시간과 장소와 사람은 꿈에서 뒤섞여, 대학생인 저는 사호와 수업을 들으며 언제 강의실에서 튀어야 하나 혼자 고민하기도 했고(옛날부터 공부하기 싫어했음;) 은유는 제가 첫 직장을 다니며 매일 때려치우고 싶다 노래부를 때(원래부터 일하기도 싫어했음;) 위로해주기도 했지요.
그렇게 오랫동안 파리에 떠 있었어요. 이곳의 생활에 적응했고(생활력과 언어능력 완전 별개;) 이 도시가 주는 자유에 만족하지만 이방인으로 제가 누리는 건 결국 쓸쓸한 자유입니다. 아마 여기 있는 내내 그렇겠지요. 백수린의 단편 <시간의 궤적>에 있는 문장처럼 “그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잡채나 불고기 같은 난생처음 맛보는 음식들을 모두 맛있게 먹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의 친구도, 나의 부모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일주일에 세 번씩 운동화를 신고 나가 파리를 걸었고, 이따금씩 길을 잃었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면 거리에 서서 조용히” 울 거에요.
왜 쓸쓸하니? 물으면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라고 아이처럼 답하겠어요. 공부하기도 일하기도 싫어하는 저는 당연히 노는 걸 좋아합니다. 근데 약간 다르게 놀고 싶구, 그게 때로는 다른 정치에 이르기도 한다구 생각해요. 켄 로치의 영화 <지미스 홀> 처럼요. 주인공 지미에게 아일랜드 젊은이들은 “신부와 경찰의 잔소리를 듣지 않고 춤출 수 있는 회관을 다시 열어달라”고 요구하고, 다시 생긴 마을회관에서 사람들은 춤추며 상상하고 노래하며 저항하지요. 그런 ‘지미스 홀’을 오랜시간 꿈꿨답니다. “요즘 무슨 책 읽어?”라는 말이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공동체, 제가 좋아하는 영화와 음악을 상대도 알아봐주는 공동체, 서로의 어둠과 구멍에 대해 조용히 나눌 수 있는 공동체… 서울에서 그런 경험은 매우 드물었지만 또한 제게 또렷이 있었기에, 파리로 건너온 후 그런 시간을 줄곧 그리워했어요.
칠월의 맑은 날이었지요. 은유랑 커피를 마시며 놀았구, 세 시간 동안 당신들과 함께 책과 글을 가지고 놀았구, 이후에 찌늬 또 사호와 함께 오래 걸으며 또 놀았습니다. 모든 놀이가 끝난 밤에 강아솔의 음성을 반복해 들었어요. “그리움이 무르익어 가는 밤/ 내 등을 따스하게 쓸어주는 밤/ 보고 싶었다는 너의 말 곰씹어보다/ 시큰해지는 밤/ 다 고마워지는 밤.” 노래 제목처럼 ‘다 고마워지는 밤’… 이런 밤이 있으니… 늙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네요(읭?;;). 그립던 공동체였고 바랐던 놀이였어요. 오래오래 기억날 거에요. 고마워요. 모두에게,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