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었습니다. 밤이었죠. 비도 내리고 있었군요. 약속 장소로 걸어가며 노래를 반복해 들었습니다. 뮤지컬 <김종욱 찾기>에 나오는 '나라의 결심'을. "마지막 당신 모습, 너무나 아쉬워/ 하지만 현실도 이와 같을까/ 열정은 식고 욕심만 깊어지겠지/ 익숙한 서로가 지겨워질 거야/ (...) 절대로 나 그대 지우지 않을게요/ 안녕, 내 사랑, 부디 안녕히." 노래를 듣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그가 저기에. 기시감으로 난 잠시 망연해졌답니다. 사실 그와 내가 '우리'라는 이름을 갖기로 약속한 과거의 그날 또한 여름이었고, 밤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으니까요. 시간이 흐르고 흘러 이제 두 사람은 서로를 묶은 그 이름을 버리려 만난 것이지요. 이별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별식은 길고 아팠습니다. 미련과 회환이 서로를 짓눌렀기 때문이었지요. 공허한 말들이 그와 나 사이를 오갔습니다. 고운 말들과 곱지 못한 말들이 비 오는 밤거리에서 섞이고 섞여, 끝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이해한다는 말 뒤로 전하지 않은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과, 밉다는 말 뒤로 전하지 못한 밉지 않은 마음. 뱉어버린 수많은 말들과 뱉지 못한 수많은 마음을 뒤로하고 이제 정말 떠나야 할 때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와 내가 마지막으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나눴던 대화는 참 기묘했군요. "내일 봐요." 이별식에 맞지 않은, 엉뚱하기 짝이 없는 그 마지막 인사는 사실 내가 제안한 것이었죠.
"내일 만날 것처럼 인사해도 되죠? 그냥 척이라도요." 소년이 유령에게 제안한 작별인사. M.나이트 샤말란이 1999년 만든 영화 <식스 센스>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대사예요. 유령을 볼 수 있는 소년 할리 조엘 오스먼트가, 이승을 떠나지 못하던 영혼 브루스 윌리스와 헤어지는 날이었죠. 영민한 소년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앞으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일 봐요"라는 작별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아, 고백건대 저는, 소년의 유령을 볼 수 있는 센스보다 저토록 맵시 있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센스가 여섯 배는 더 부러웠답니다. 깔끔하게 굴지 못하고 언제나 질척거려 아우성이었으니. 누군가와 이별을 한다면 꼭 저렇게 하기를 바랐고, 그 오랜 바람을 그날 이뤘습니다. 그러나 나는 곧 깨달았습니다. 삶은 영화와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불길히 예감했습니다. 그 마지막 인사가 힘을 가져, 나를 옭아맬 것이란 미래를.
그 후로 나는 뇌었습니다. 홀로 거리를 걸으며 뇌었습니다. 내일은... 언제 오는 것일까. 내일이 온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내일이 왔을 때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내일을 내가 소스라치며... 피하지는 않을 것인지.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내 안에서 내일은 3개월 후가 되었다가, 30년 후로 멀어졌다가, 3분 후로 앞당겨지기도 했습니다.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기억들에 좇기며 내일을 생각하던 사이로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와 갔던 극장에서 홀로 영화를 봤지요. 그가 좋아했던 음악이 거리에서 흘러나왔어요. 그에게 속삭여준 아름다운 시를 다른 사람에게 읽어주기도 했군요. 그러면서 내일에 떨었습니다. 내일은 마치 유령 같았군요. 내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내일을 기다리던 사이로 수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과거가 되어버린 현재를 걸으며 아파하던 날들도 지나갔지요. 청춘이 속절없이 가버렸다고 생각한 어느 날, 불현듯 나는 깨닫고야 말았답니다. 눈물을 흘리며 이별했던 그때의 나와 그는 이미 죽었고, 어떤 내일은 평생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