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해야만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냄새

by 잠시 멈춤

아주 오랜만에 무궁화호 기차를 타봤다. 15년 정도만에 타본 것 같다.

휴직을 하고 처음으로 부모님을 뵈러 내려가는 길, 내 차 운전도 아니고 KTX도 아닌 느리고 좁은 무궁화호를 예매했다. 단순히 비용이 저렴해서는 아니였다.

복잡한 기분때문인지 무궁화호 특유의 덜컹거림과 차창밖으로 스쳐가는 여행길의 풍경을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역을 정차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림을 반복했다. 계속해서 바뀌는 옆 승객의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에게 이동하는 시간은 항상 지루하고 낭비되는 시간이었다. 가장 빠르게 또는 편하게를 선택하는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번 기찻길은 낡은 무궁화호에 앉아 불편한 시트와 긴 시간을 보냈음에도 즐겁고 선명했다.

조용히 읽던 소설책도 중간에 봤던 유튜브도 심지어 앞뒤에서 들리는 소음조차도 모두 각자의 색깔이 떠오를 정도로 잘 느껴졌다.


여러정차역 중 내 고향 기차역도 있었다. 학생시절 꽤 넓고 크다고 느껴졌던 역사는 전형적인 시골역의 모습처럼 낡아 있었다.


읽던책을 잠시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곳을 뛰어 다니던 중·고등학생 당시 나의 냄새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때 나름의 심각한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지만 지금과 다르게 밝게 웃을수 있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던 그 당시 나의 모습과 냄새가 작은 시골역의 공간과 함께 선명하게 느껴졌다.


무궁화호 기차와 고향 기차역은 나에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기억들이다. 최근의 나는 정신없는 일상속 수많은 숫자와 업무로 정확함과 신속함만을 추구했다. 결국 잠시 멈춤을 결정했고, 그 멈춤속에서 우연히 만난 이번 기차 여행(?)은 나에게 생각지 않은 힐링시간이었다.


"희미하고 기억도 잘 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그 당시의 냄새가 있다는 것"이 어쩌면 앞으로의 삶에서 큰 위로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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