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캅스'에서 '아수라'까지.
누아르(noir)는 '검은'이란 의미를 가진 프랑스어를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에 소개된 헐리우드 영화들 중에서 비교적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B급 영화이자, 어두운 분위기의 범죄 스릴러물을 필름 누아르라고 칭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범죄와 폭력세계의 삶을 다룬 영화라고 보면 되겠다.
영화평론가의 입장을 뒤로 하고, 철저하게 관객의 입장에서 한국식 누아르를 떠올려 보고자 한다. 그 속에 우리의 심리를 들여다 보는 개운한 뒷맛까지 느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어느 정도 범죄와 폭력세계에 관한 영화가 흥행의 카드처럼 되어 버린 시발점은 아마 93년에 개봉한 '투캅스'(박중훈, 안성기)라고 생각된다.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박중훈은 확실히 형사물 배우로서의 최고점을 점령한다. 편의상 '누아르 1기'라고 하자.
그렇게 몇 년이 흘러 다시금 '한국식 누아르'를 만들어낸 해가 2001년이 아닌가 한다. (누아르 2기) 왜냐하면, 당시 같은 해에 여러 편의 누아르가 개봉하며 대단한 흥행가도를 달렸기 때문이다. '신라의 달밤'(이성재, 차승원), '두사부일체'(정준호, 정웅인), '달마야 놀자'(박신양, 정진영)이 모두 2001년에 개봉했다면 쉽게 설명이 될 것 같다.
글의 초반부터 계속 '한국식 누아르'란 표현을 쓰는 이유는 일반적인 '필름 누아르'의 범죄, 폭력의 어두운 단면을 그린 영화와 다르게, 액션 코믹물의 소재로서 범죄조직과 폭력의 단면을 채용했다는 점이 일반적 누아르와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어쨌든 사람들은, 남들 싸움 구경하기를 좋아하고,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서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범죄조직의 단면을 스트레스 풀 듯 유쾌하게 바라볼 수 있는 양념요소가 가미된 영화를 즐겨 찾게 된 것이다.
시기 자체가 IMF 등으로 침체된 시점에서 무언가 통쾌하고 코믹하게 때리고 부수는 영화가 관객들 구미에 맞았던 점도 작용한다. 이때부터 흥행영화가 한 해에도 여러 편 등장하게 된다. CGV의 전신인 CJ 골든빌리지가 98년에 서울 강변 테크노마트에 멀티플렉스식 극장 1호점을 만들고, CGV로 사명을 변경한 해도 2001년인 점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부분이다.
이러한 흥행코드를 갖춘 비슷한 장르물이 계속 개봉하지만, 큰 의미의 기능은 하지 못하고 몇 년이 흐르다, 2005년에 개봉한 '달콤한 인생'(이병헌, 김영철)은 여러 모로 새로운 '누아르'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이전까지의 '한국식 누아르'가 조폭이 소재로 활용되는 액션 코미디물의 성격을 띠었다면, 이 영화를 통해 실제 범죄조직의 리얼리즘을 표방한 단면, 인간으로서의 어두운 심리가 격렬하게 충돌하면서 '넌 내게 모욕감을 줬어'라는 대사까지 크게 유행하기에 이른다. 범죄조직은 서열사회이자, 인간의 본능이 충돌하는 집단이자, 어두운 폭력의 세계가 아주 현실적으로 녹아들기에 최적의 코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능에 대해 정면으로 다루길 원하는 감독의 욕구에 맞게 철저히 활용되었다.
이 영화의 인기와 더불어 2006년에 '비열한 거리'(조인성)과 '해바라기'(김래원)가 연달아 흥행하며 한국식 누아르의 재탄생을 알린다. 본격적인 누아르의 3기는 작품으로서도 가장 정론에 충실하지만, 이병헌/ 조인성/ 김래원의 배우로서의 묵직한 전환점으로도 기억된다. 누아르 영화의 성공은 배우에게 있어, 연기 스팩트럼을 극대화시키며, 강렬하게 관객에게 인상을 남긴다는 장점을 갖는다.
재밌는 현상은, '투캅스'(1993)를 시작으로 한 한국식 누아르가 몇 년을 주기로 흥행코드과 굵직하게 맞물린 다는 점이다. 이후 8년이 지나, '두사부일체(2001)' 등이 그러했고, '달콤한 인생'(2005) 이후 7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강력한 메타포의 누아르가 등장한다. '범죄와의 전쟁'(2012/ 최민식, 하정우)과 '신세계'(2013/ 최민식, 황정민, 이정재)가 그러했다.
인간의 욕망은 얼마나 극에 치달을 수 있으며, 더불어 얼마나 나약해 질 수 있는지, 사람이 변한다는 건 권력과 본능 앞에서 얼마나 쉬운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크게 흥행하게 된다. 물론 어떤 장르에 너무 몰입하면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 이병헌, 최민식)과 같이 너무 멀리 가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잔인한 것에만 치중한 영화는 인간의 군상을 다루려다 오히려 공포영화도 아닌 어설픈 리얼리즘의 하드보일드 영화로 끝을 맺기 마련이다. (여기까지가 누아르 '3기'라고 보여진다.)
좋은 영화란 사람마다의 차이는 있으나, 과하지 않은 설정으로 감독의 의도를 자연스레 배우와 소재 속에 녹아들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 소재가 흥행코드와 맞물려 '한국식 누아르'를 탄생시켰다. 아이러니 하게, 본격적인 누아르를 표방했던 '달콤한 인생'(2005)과 너무 멀리 가버린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가 동일하게 김지운 감독 작품이란 점은 달콤쌉쌀하다. 배우의 연기가 과해도 좋지 않지만, 감독의 연출 의도가 너무 과해도, 방향성을 잃어버리기 쉬운 법이다.
요즘은 다시금 '한국식 누아르'가 전성기를 맞고 있다.
'내부자들'(2015/ 이병헌, 조승우, 백윤식), '마스터'(2016/ 이병헌, 강동원, 김우빈), '아수라'(2016/ 정우성, 황정민, 주지훈, 곽도원), '공조'(2017/ 현빈, 유해진, 김주혁), '더 킹'(2017/ 정우성, 조인성, 배성우)에 이르기 까지... 이전의 누아르와 다른 점은 현재의 정치적인 상황, 한국식 부조리를 다루려고 노력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의욕이 과하면, 다시금 '아수라'와 같은 영화가 나오나 보다. 정말 말 그대로 무엇을 말하는 지 알 수 없는 어설픈 잔인함의 향연이 영화 내내 이어지는 '아수라장'이다. (누아르 '4기')
개인적으로 '한국식 누아르'가 가장 작품의 완성도와 맞물린 웰메이드 누아르는 아마 달콤한 인생/ 범죄와의 전쟁/ 신세계의 '3기'가 아닌가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현재 2-3년간 쏟아져 나왔다고 위에 소개한 5편의 영화는 본격적인 누아르를 한국적 부조리 시국에 맞추어 살짝 비튼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남북간의 대결구도 소재도 다시금 채용되고, 어설픈 잔인함의 영화가 툭 튀어나오는 등 약간 갈팡질팡 하는 느낌이어서 아쉽다.
소개하지 못한 영화가 꽤 있지만, 일단 관객의 입장에서 철저히 바라본 개인적인 소견임을 밝힌다. 더불어, '한국식 누아르'가 인간의 본성과 어두운 면을 저급하지 않게 다루면서도, 너무 뻔한 소재의 조폭영화로 흘러가지 않기를 바란다. 범죄조직과 인간의 군상을 잔인하게만 다루는 영화는 가장 아마추어적인 느낌만 풍기는 것을 말하고 싶다. 모든 영화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는 없지만, 멋스럽게 화두는 던져야 영화가 아닌가라고 감히 생각해 본다.
'한국식 누아르'의 변천사에서 드러난 우리의 심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조폭 액션 코미디물로 마냥 스트레스를 풀고 답답한 현실에서 한 번 웃어 넘기고자 했던 시기가 누아르 1, 2기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인간으로서의 본능에 범죄조직 코드를 과하지 않은 설정으로 녹여냈던 3기는 순수한 인간의 나약함과 본능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심리가 묻어난다. 그리고 다시금 작품성보다는 흥행성에 집중하며 범죄조직 소재를 활용하다 보니, 개연성이 급진적으로 깨져버린 최근의 4기는 여러 모로 아쉽다. 그리고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영화인 '내부자들'이 기울어지는 대종상 영화제에서 5관왕을 했다는 아이러니컬하고도 개운치 않은 뒷맛까지.. 그래서 아직 한국식 누아르는 유효하지만 방향성을 잃지는 않았는지 걱정되는 현 시점..
이미 다룰 수 있는 소재와 인간의 군상은 93년 이후로 25년간 다 나왔다고 본다. 앞으로의 '한국식 누아르'는 감독과 배우의 조합으로 잘 할 수 있는 몇 가지에만 집중하여 제작한다면, 더욱 유쾌하고 멋스런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