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
우리는 하루종일 오뚜기처럼 사는 것만 같다. 옆으로 비뚤어지고 몸이 기울어도 다시 똑바로 서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흔히 얘기하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선다’는 개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오뚜기를 보자면, 바로 서 있는 상태에서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다. 왜냐면 모두들 오뚜기와 같은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바로 서서 안정적인 관점을 유지한 상태에서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건 아닌데도 말이다. 가끔은 머리를 갸우뚱 해보며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삶에 의미를 부여해도 좋은데 말이다.
스미레는 얼굴을 찡그리고 몇 번인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 겉보기와는 달리 이상한 사람이네.”
“사람은 누구나 어딘가 이상한 거야.”
내가 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흔히들 정상과 비정상을 얘기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정상적’이란 단어는 특정 국가나 문화, 혹은 지역에 국한된 것이 많다. 어느 나라에 살면 정상적인 행동이 다른 나라에선 비정상적인 것이 된다. 식생활부터 사고방식, 관습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는 상당히 방대하다. 쉽게 말해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한국사람만이 갖는 사고방식을 고수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솔직히 국민성이라는 어설픈 개념으로 한국인을 설명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우린 남의 눈치를 늘 보며 살고, 남의 평가에 기대는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조금이라도 선이 벗어난 행동과 말은 삼가라고 강요 받는 어린 시절을 보내 왔다. 남보다 튀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남보다 튀어야 경쟁에서 살아남는 아이러니한 인생을 수십년 달려 왔다. 조금 지칠 때도 됐다.
나와 너는 어차피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친구끼리도 개성이 다르고 좋아하는 디저트 종류가 다르다. 연인 사이도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 또한 그러하다. 자신의 인간관계 카테고리 안에 들어와 있는 존재는 왜인지 모르게 적당한 선을 지켜야 하는 것만 같다. 그러다 어떤 사람이 이상한 행동을 하면 상식 이하의 취급을 하고 자신의 방식을 강요하거나 집단에서 밀어내기 일쑤다. 왕따도 같은 개념이다.
사람마다 중요시하는 매너가 있다. 식사 예절을 포함하서 사람 사이에서 갖추어야 할 행동지침, 생각의 범위, 취향의 한계성 등등. 그 몇 가지 ‘CRITICAL POINT’를 저글링 해가며 남을 평가해 간다. 저글링하는 사람은 나일 뿐이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왜 같은 기준을 들이대는가?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 꼭 밥그릇에 붙은 몇 가지 밥알까지도 비워가면서 먹는 것을 예절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다른 사람은 반대로 밥 몇 톨을 남겨야 음식을 대접해 준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고 교육 받으며 자랐다고 해보자. 누구 하나 잘못된 것은 없다. 살아온 환경과 교육방식, 여러 경로를 통해 접한 문화적인 백그라운드가 다를 뿐이다. 강요할 수는 없다. 누구든 누구를 말이다.
아까 얘기한 저글링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저글링 하는 공이 많을수록 인생은 스펙터클해 지고 굴리는 재미가 있다. 판타스틱한 나만의 삶이 창출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일정 수 이상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을 계속 바라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피로해 지고 끝까지 집중을 할 수 없게 된다. 내 기준을 스스로 갖고 인생을 즐기는 데 마음껏 자유로이 유용한다면 좋지만, 반대로 남에게 잣대를 가져가면 남들 사이에서 흔히 말하는 ‘피곤한 스타일’이 된다.
물론 적당한 수준의 예외는 있다. 누구라도 일반적인 수준에서의(여기에서 어느 범위가 일반적이냐 하는 문제는 ‘단상’시리즈 담론의 범위를 넘어선다. 문화인류학이나 철학의 범주에서 다룰 일이다.) 상식을 넘어서는 반인륜적인 모습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기준으로 저글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급부적으로 어떤 조직의 목적 달성이나 공동의 가치 창출을 위해선 때론 개개인의 자유로운 저글링을 멈추고 큰 공을 같이 굴릴 필요가 있다. 그것이 각자 더 즐거운 저글링 인생을 도와준다는 전제 하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회사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업무회의를 하고 적당한 보수를 챙기는 등의 사회활동에 있어 이런 성격이 자주 보인다.
누구든 솔직히 남과 다른 자신을 발견할 때 기분이 좋다. 그런데 남들은 자신과 다른 누군가를 보면 상식을 벗어났다고 하고 이상하다고 한다. 자신은 유니크한 삶을 살고 싶어 안달이 났으면서, 남은 일정 라인을 넘어선 행동을 하면 가차 없이 손가락질을 한다. 꽤나 웃긴 모습이다.
공동체적인 삶의 패러다임이 변화한 것을 느끼고 있는가? 이미 시대가 변했다는 얘기다. 태어난 국가 집안, 속한 단체, 운명적인 그 무언가, 캐치프레이즈 등으로 남을 옳아 매는 시대는 벌써 한참 지난 일이다. 회사 또한 조직의 일체감과 공동의 목표를 위해 무언가를 제시해야 한다고 하지만, 단순히 그럴 듯한 구호와 행동강령으론 직원을 움직일 수 없다. 실제적인 보상과 개인적 삶의 업그레이드적 관점에서 무언가를 실질적으로 고민하지 않으면 구성원은 진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적당한 수준 이상의 성과가 나오기 어렵다.
무언가 빙 에둘리듯이 얘기하는 것 같아 겸연쩍은 맘이 좀 들지만, 결국 ‘이상한 사람’으로 살아가도 좋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남이 볼 때 좀 이상하면 어떤가? 내가 생각하는 삶의 패러다임을 소중히 여기고 여러 가지 장치와 방편을 통해 일상을 구현해 나가는 것이 왜 잘못인가?
이상한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더욱 CREATIVE해 지고 ACTIVE해 진다. 물론, 적당한 선에서 사람들을 관리하고,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개개인이 어느 정도 지켜야 할 선을 염두에 두고 실제적인 통제는 국가나 시스템에 맡겨 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을 넘어선 방종은 지금 얘기하려는 ‘이상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모범적이고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은 어딜 가나 환영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자기자신은 허무해 지기 쉽다. 남이 보기에 그럴 듯한 인생은 실제로 별 볼일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난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고 착한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남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는 인생을 가능성도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삶이란 그 자체가 자신이 추구하는 신념이 되고 삶의 보람이 될 때만 의미 있는 것이지 허울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진 않는다.
흔히들 ‘나쁜 남자’가 매력적이라고 한다. 실제를 들여다 보자면 경우 없이 행동하는 사람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감정이나 기분을 솔직하게 밖으로 분출할 수 있는 것에 점수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본다. (나쁜 남자도 잘 생기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이성학 개론’과는 조금 다른 관점이다.)
요즘 B급 문화가 각광 받는 것도 같은 이유다. 키치적인 문화, 김구라 같은 솔직한 토크, 싸이의 엽기적인 무대매너, 독설과 같은 박명수의 논조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솔직함이다. 점잔 빼면서 클래식함을 추구하기 보단 그냥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표출할 줄 아는 것이 바로 매력이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삶의 행보를 이어갈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이 이상한 나를 갸우뚱한 시선으로 바라봐도 개의치 말자. 그저, 나 자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에 솔직해 지면 ‘인생의 스팩트럼’이 무한대로 넓어질 수 있다.
우리는 사회현상을 바라봄에 있어 조금은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 무슨 얘기냐 하면, 환영 받는 어떤 문화나 사회현상에 있어 겉과 속, 껍질과 알맹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상한 사람’이 되어도 좋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치며 제멋대로인 것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다. 솔직해도 좋지만 인신공격이나 타인의 감정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살 필요는 없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다. 우린 살면서 알게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잘 발견하며, 엣센스만 뽑아내는 개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더더욱,
좀 더 노련해 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입체적인 사람이 되어도 좋을 일이다.
좀 더 이상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나만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저 마음 속에서 원하는 대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