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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심리학 TV

난무한 기사 속, 나를 발견하기.

'패러다임’에 관한 단상

by TV피플


요즘과 같이 다양하고 주제 없는 인터넷 기사가 난무하던 때가 또 있을까. 아주 얄팍한 캡쳐형 헤드라인을 클릭해 보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일관하는 황당함. 누구에게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 때 ‘정보의 홍수’를 경험한 적이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종 세계 곳곳의 기사를 접하다 보면 한정된 시간 속에 얼마만큼의 분량으로, 어떤 깊이로, 무슨 정보를 읽어야 할 지 난감했었다. 내가 읽는 정보는 적절한 유효성을 갖는가로부터 시작해서, 실시간 시황을 알려주는 정보는 또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고민까지. 꽤나 머릿속이 바빴던 기억이 있다.




일상적인 사회현상에 관한 기사를 읽자면, 깊이 있는 기사를 읽고 싶은 욕구에 목마르게 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한 주가 지나면 내가 지난 주에 읽은 정보는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꽤나 곱씹어 볼만한 노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누구나 기사를 양산하고, 누구나 기사를 평가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기사의 질보다는 양에 승부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많은 조회수와 관심을 이끌어내는 글을 쓴 사람이 대중의 관심을 받는 세상 속에 있다. 좀 더 자극적이고, 신랄한 단어를 선택하는 묘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아침 뉴스를 보기 위해 TV를 켜도, 이러한 현상이 반영된다. ‘잡지식 뉴스 보기’는 이미 일반화가 되었고, 연예뉴스는 늘 일정 시간을 할애 받는다. 인터넷에 올라온 각종 신변잡기적 동영상과 화젯거리까지 터줏대감 마냥 기사의 중심에 서 있다.




모든 기사가 품위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점잖음과 고상함보다는 대중의 관심을 반영하는 세련되고 감칠맛 나는 기사로 전환되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인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왠지 모를 씁쓸함은 입가 언저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아니,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점점 허무하게 만드는 걸까?

‘패러다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사는 정보를 전달하는 목적이 1차적이지만, 그를 넘어서 자연스런 사고의 흐름을 도와주고, 최대한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판단의 잣대를 제공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본다. 어떤 분야의 기사라도 좋다.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그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주어진 현상을 의미 있게 바라볼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하는 순간, 기사는 ‘좀 더 현실적인 유용성’을 갖는다.


정보의 난무함 속에, 패러다임이 없으니 우리는 정신적으로 공허하다. 어떠한 기사를 읽어도, 사물이나 현상의 단편적인 측면만을 보기 좋게 드러낼 뿐이다. 아무리 많은 기사를 읽어도 내 속에 남는 건, ‘단편적인 정보와 단어의 나열’뿐이다. 이러한 단편적인 정보는 자본주의와 교묘하게 결합하여 더욱 얄팍해 진다.

일례로 “어떤 배우가 얼마짜리 집에 산다, CF를 10개 하니 얼마를 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니 무언가 현실이 원망스럽다.” 따위의 감상.




그럼에도 TV속 인물의 일거수 일투족을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나마 기억에 잘 남는 기삿거리이기 때문이다. 바쁜 하루의 업무 속에 무언가 머릿속에 남기려는 노력이 못 견디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 대화하려고 기사를 흡수하는 눈물겨움도 간과할 부분이 못 된다. 소통이 부재한다. 의미 없는 정보를 긁어 모아서라도 화제의 틈바구니 속에서 소외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가만히 기사를 찾아보면, 꽤나 의미 있게 평론과 의견을 덧붙인 기사가 있다. 특정 잡지의 편집장, 문화평론가, 자유기고가 등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그 안에서 또 다른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다. ‘선순환적인 의미의 정보 재구성’이다. 마음이 훈훈해 지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꽤 괜찮은 구성의 웹진도 몇 군데 들여다 볼만 하다. 하지만 대부분 관심을 갖지 않고, 얄팍한 기사에 얄팍한 댓글이 주를 이루는 ‘미디어의 오늘’이 아쉬울 뿐이다.

‘책 -> TV -> 인터넷’으로 옮겨가는 정보매체의 변환 속에서 ‘책은 중심을 잃을 것’이라고 혹자는 얘기했지만, 접근성과 이용율만 상대적으로 낮아졌을 뿐, 사람들은 오히려 책에 반대급부적으로 열광하는 것 같다. 직접 책을 고르는 구매행동에서 내가 직접 가치를 부여한 만족감이 있고, 손에 쥐고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새로운 옷을 입는다. 한 발 더 나아가, 생각의 끝엔 ‘패러다임’을 꽉 붙잡고 싶은 순수한 지적욕구가 꿈틀거리고 있다. 발산하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어진 지도 모른다.

‘패러다임’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틀이나 체계”




‘시대를 꿰뚫는 패러다임’을 소중하게 만들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것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암묵적인 약속이자 의무인 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한 약속을 실천하는 것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선 좀 더 먼 얘기일 지도 모른다. 긍정적인 패러다임을 위한 사회적 노력. 내가 굳이 갈구하지 않아도 일정한 형태와 틀을 갖추게 될 것이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개인적인 패러다임’이다. 내가 나답게 살고 있냐 하는 것에 관한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만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세상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꽤 중요한 구심점을 갖는다. 누군가 퍼다 나른 생각이 아니라,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나 스스로 깨닫게 되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갖고 싶은 것이다. 세계관도 좋고 가치관도 좋다. 결국은 내가 나다울 수 있는 ‘세상 뽀개기’가 없으면 그냥 무인도에 사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그러한 ‘개인적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데 있어, 양질의 기사는 좋은 밑거름이 된다. 하나의 정보와 기사를 접해도 의미 있는 맥락이 있는 글을 읽으면 무언가 개운한 기분이 된다.

물론, 큰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당분간 난무한 기사의 조잡한 흐름은 꽤나 기나긴 레이스를 이어가며, 사람들을 공허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좋은 기사를 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나만의 생각은 무엇인 지 조금씩 고민하려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사막에 있지만, ‘오아시스와 같은 생각과 패러다임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나만의 오아시스를 갖지 않고선, 이 공허한 정보의 사막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삶이 꽤 재미있게 느껴지게 할 ‘나만의 패러다임’. 당신은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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