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 해를 뒤들썩하게 했던 먹방, 쿡방의 브라운관을 가만히 들여다 보자면, 하나 재밌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살면서 의식주가 중요한 건 당연한 거지만, 입고 먹고 사는 생활과 밀착된 이슈에 대해 가장 변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먹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에 주목한 일반 대중이 먹는 것에 대해 더욱 강렬한 욕구를 갖고 여러 가지를 바꾸려고 한다는 점, 그리고 그 바꾸려는 것에 비해 더욱 다양해져 가는 정보를 따라갈 수 없으니 무언가 남이 요리하거나 먹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대체해 간다는 점이다.
물론 아주 정갈하고 교과서적인 레시피엔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먹는 한 끼의 식사가 무언가 새로운 재료, 새로운 소스, 독특한 조리법을 통해 그리 금전적 부담이 크지 않은 채로 바뀔 수 있다면, 꽤나 내 일상이 특별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작은 일상의 변화가 나의 아이덴티티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면,,, 그 일상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세..
하루하루 일상의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어찌보면 짠한 이야기다. 사는 것을 바꾸려면 집을 새롭게 장만하거나 인테리어를 바꿔야 하고, 입는 것을 바꾸려면 근처 옷가게나 백화점에 가야 한다. 유형의 재화를 구입해야 하는 전제가 깔려 있다. 뭔가 부담스럽고 새로운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먹는 것에 대한 문제는 다르다. 조금 특별한 식사를 하는 건, 꼭 레스토랑에 가지 않아도 돈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런데 모든 음식을 맛 볼 수 없고, 모든 요리를 직접 해볼 수 없으니 나만의 식사, 나만의 요리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어 쿡방, 먹방을 보며 대리만족하고 문화적인 미디어의 컨텐츠는 확대 재생산 된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나의 한 끼 식사에서 변화를 주려는 욕망으로 번졌고, 그 중 가장 간편하고 저렴한 라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2011년 꼬꼬면 이후로 잠시 주춤했던 라면 열풍은 점점 퍽퍽해져 가는 일상에 대한 궁여지책으로 강렬한 맛, 좀 더 색깔이 강렬한 라면에 꽂히게 되고, 짜파구리의 바람이 잠시 흐른 뒤, 작년 중반 짜장라면 열풍에 이어 연말 짬뽕라면 열풍으로까지 이어졌다.
짬뽕라면의 4대천왕으로 불리는 진짬뽕(오뚜기), 맛짬뽕(농심), 불짬뽕(팔도), 갓짬뽕(삼양)의 열풍으로 지난 3개월간 1억개 이상의 판매가 일어났다고 하니, 문화현상으로 봐도 가히 과한 시각은 아니다. 경제가 어려우면 보통 더욱 매운 맛을 선호한다고 하는 흐름과도 무관하진 않으나,,
그보단 가장 일상과 가까이 하는 식사인 라면에 있어서도 프리미엄이 가미되고 화끈하게 나만의 개성이 반영되어야 하는, ‘일상의 편집욕구’가 발현된 것이 더 맞는 해석인지도 모른다.
단순한 컨슈머적 전통 소비자에서, 만들어진 기성품을 소비자가 새롭게 활용하는 모디슈머(modisumer), 직접 체험을 강조하는 트라이슈머(trysumer), 사회적 의견을 제시하는 소셜슈머(socialsumer), 전시회 큐레이터처럼 스스로 삶을 꾸미고 연출하는 것에 집중하는 큐레이슈머(curasumer), 평범한 제품의 진화를 꿈꾸는 메타슈머(metasumer)까지. 이처럼 다양한 소비적 성향이 파생되고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이고, 개개인의 마음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는 행태이기도 하다.
간단히 맥락을 짚어본 것처럼, ‘라면으로 바라본 식생활적 개인욕구’와 ‘소비에 숨어 있는 누군가의 바람들’,,,, 먹는 것과 소비하는 일상적 행위들의 편집욕구는 어쩌면,,,
어느새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들이 실제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안타까움에서 출발한 욕망의 변형은 아닐까.
리먼 쇼크 같은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지난 수년간 경제적으로도, 사는 것 자체도 많이 어려워진 느낌이다. 정보는 더욱 다양하게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 지는 더욱 더 많이 정보를 접하지 않으면 모르게 되어 버렸다. 정보가 단순히 1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2차원을 이해해야 3차원의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 정보의 부익부 빈익빈은 더 심해지고 있다. 정보화 사회가 아니라 이젠 정보편집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 삶의 틈바구니 속에서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소시민적 일상은 뒤로 하더라도 내가 나다워지고 싶다는 한 개인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욕구. 그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간단한 라면 한 끼에도 내 취향을 반영하고, 구매를 하더라도 같은 비용으로 내 스스로 편집을 해나간다. 난 이러한 정신없는 사회에서 나를 지키고 표출하고 싶은데, 가진 것은 많지 않고,, 그래도 일상이 바뀌지 않다면 난 너무 외로운 것 아닌가. 그래서 먹고 소비하는 일상적 행위에서 변화를 꾀하고 싶은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각종 움짤이 난무하고, 각종 종편에선 지상파의 전통적 위상에 밀리지 않으려 각종 패널이 중구난방으로 등장하며 정보를 재편집하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정보를 흡수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어찌보면 ‘편집이라는 형태의 정보 수용’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 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일상을 재편집해 나가며 나다움을 유지하고 싶은 우리의 문화적 한 켠. 무언가 따뜻해 지는 듯, 가슴 한 켠이 시큰하다.
작년 가을에 발간된 소설가 김 훈의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에 등장하는 라면과 위에서 언급한 라면은 조금의 온도차는 있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 1인당 연간 70개 이상의 라면(한국전체 연간 소비량 36억개)을 먹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일상에 묻어나는 무언가에게 관심을 갖고 의미를 편집해 가는 측면에 있어선 꽤 닮아있지 않은가 한다.
오늘은 라면을 끓여 먹어야겠다.
그리고 또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