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미더머니,, 그 뒷이야기..
모든 사람은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할까? 정답은 쉽게 말할 수 없고, 원래 정답이랄 것도 없지만,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누군가는 대중 앞에 서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원한다. 또 누군가는 자신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 충실하며, 하루하루 계획한 것을 실천해 나갔고, 또 사람들을 제한적으로 만나는 것으로 또 다른 자신의 영역을 설정했다. 무엇이 옳다고 볼 수 없다. 다만, 10, 20대의 젊은 세대들은 누군가의 앞에서 그 무엇이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솔직한 자기를 표출하고 싶어 한다. 빙빙 에둘러서 말하는 것은 점잖은 것이 아닌 촌스러운 것이 된다. 사회에서 원하는 멋진 자격을 얻지 못할 바에야,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이미 이뤄놓은 것이라면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꿈’이라는 단어만이라도 입 밖에 내고 싶어 한다.
바로 여기에 랩스타의 ‘탄생’이 시작된다. 올해 초 MBC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랩스타의 탄생’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쇼미더머니(이하 쇼미)’가 있었다. 미디어의 힘이란 실로 엄청난 것이였다. 아무도 그 흐름을 막지 못했다. 막을 수 없어서 한 켠에서 그 프로그램을 디스했던 것마저 또 다른 흐름을 만들어 내며 ‘쇼미’의 인기를 우회적으로 재증명했다.
왜 랩스타가 탄생되었나. 10, 20대에 남이 주목할 만한 무언가를 이뤄내기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학력, 스펙, 좋은 직장, 사회적 성공, 부를 이뤄내기엔 아직 배움이 완성되지 않았고(물론 인생 전반에 걸쳐서 배움이 계속되지만, 교육기관에서의 배움조차 채 끝나지 않은 시기라는 의미에서..), 그래서 남들에게 보여줄 게 별로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선 더더욱 보여줄 게 없다. 주변에서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을 굳이 꺼내들어 무엇하나란 생각이 팽배하다. 그래서 자신의 그 무언가를 손바닥으로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주머니속으로 집어넣고 만다. 뭉뜽그려진 꿈과 함께.
하지만, 힙합 문화의 중심을 통해서라면 다르다. 내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이라도 그 꿈을 당차게 표현할 수 있다면, 자기 정체성이 확보되고 또 다른 의미의 성공선상에 있는 것으로 대중이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 핵심적인 논리를 꿰차고 적당한 방송식 스토리텔링과 플롯을 덧붙이고, 모인 사람들을 경쟁시킨 게 ‘쇼미’다.
그 방송(‘랩스타의 탄생’)을 잘 들여다 보면 여러 캐릭터와 굴곡있는 인생이 등장한다. ‘쇼미’ 출연 이후 다양하게 변화하고 대중의 중심에 선 여러 래퍼가 등장한다. 방송 출연 후 주목을 받아, 게릴라 공연해도 쉽게 사람들을 끌어 들이는 ‘올티’를 비롯해서, 심사위원으로 나선 래퍼들도 여러 유형이 등장한다. 정신질환으로 군 조기 제대 후, 소속사 통해 랩 강습 공지를 띄워 이율배반적이라는 ‘스윙스’. 좋은 성적으로 유학을 갔던 우등생이였다가 자신의 랩퍼의 꿈을 위해 자퇴를 선택한 ‘서출구’.
소속사 JYP를 통해 트로트식 댄스곡 ‘맛좋은 산이’를 들고 나와 이름을 알린 ‘산이’는 버벌진트에 대한 디스와 아이돌 곡 피쳐링을 통해 대중가수의 어설픈 힙합씬 기웃거림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각종 욕설이 난무하는 자극적인 가사의 ‘블랙넛’, 자수성가(SELF-MADE)의 성공한 랩퍼 겸 프로듀서 도끼와 더 콰이엇까지..
새로운 방송에 출연해서 인지도를 얻고, 이를 통해 자신이 원래 하고 싶었던 랩을 더욱 더 확실하게 펼칠 수 있다는 생각은 크게 틀린 것이 없어 보인다. 다만, 블랙넛의 경우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구상을 갖고 ‘쇼미’에 나간 것은 아닐까. 일반적인 상식에서 어긋난 각종 욕설과 편견, 그리고 여성 비하가 개인 모욕죄의 수준까지 넘어선 것을, 이미 그의 노래를 들어 봐서 알고 있는 나로서는 전혀 동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부모님의 빚진 것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음악을 한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명분이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의 가사는 상대방에 대한 디스를 넘어서, 범죄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빠지는 랩 가사들이 난무한다. 그리고 스윙스는 그를 괴짜 랩퍼이자 이단아라는 호명 하에, ‘쇼미’에 출연해서 인지도를 어떻게 해서든 높이고, 그걸 통해 세상이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고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블랙넛에게 ‘쇼미’ 지원을 밀어 붙였다고 한다.
그 ‘어떻게서든’이란 부분에 있어, 모두가 불편해 질 수 밖에 없는 게 아닐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 힙합이 아니다. 힙합은 음악이기 이전에 하나의 개인을 드러내는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중심엔 랩이 있다. 힙합의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바로 랩을 읇어 대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이왕 랩을 시작한 마당에, 자신을 유효하게 드러내야 할 것이 아닌가. 유효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녹아 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소한의 상식과 공평함을 가지고 무언가를 시도해 본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힙합이라고 해서, 하나의 쇼라고 해서 그냥 마음껏 분풀이 하듯, 혐오의 감정을 가득 담아, 이것을 디스 문화라고 하고 사이퍼라고 하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떼를 쓰며, ‘나는 원래 어린 아이니까 다 받아주세요’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 새로운 문화에 적응한다는 것, 또 다른 힙합씬의 중심에 선다는 것, 미디어를 적절히 이용한다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쉬운 게 없다는 건 바꿔 말하면, 주변 속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완벽하라는 게 아니다. 주변 속에서 바라본다는 의미는, 내가 하려는 행동을 남이 했을 때애도 동일한 관점에서, 기분 좋게(최소한 거부감은 없게) 바라봐 줄 수 있는 지를 상식적으로 자체-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랩스타의 탄생’이란 거창한 코멘터리 속에서, 누군가는 인지도를 자랑했고, 누군가는 1년에 몇 억 벌었다고 매출을 수익처럼 외쳐 댔다. 거친 세상에 대한 도전이, 돈 벌고 이름 알리는 것 말고 없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듯…
물론 삶의 방식은 다양하다. 누가 누구에게 뭐라고 할 권리가 어디까지인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부분을 간과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랩스타의 탄생이,
무조건 환영할 만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