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아날로그 튜닝.
글을 쓰는 가장 좋은 점은,
글을 통해 정리한 생각을
조금이라도
일상에 적용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감정이 곤두박질치고, 상념이 쏜살같이 지나가며, 행동이 거리를 잃고 방황할 때, 가만히 내가 쓴 글의 몇 가지 메타포를 떠올리면 일상에서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조금은 덜 어렴풋이 생각하게 된다. 일정한 흐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정신 없고 불안하지만 말이다.
지난 한 주를 보내면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상들만 일어났다. 예상한 나의 정신적 흐름, 사무적 스케쥴, 개인적인 여가의 적절한 롤러코스터가 궤도를 마구 이탈했다. 갑자기 지방 출장을 갔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졌다. 감정적 소모도 컸다. 인간관계도 헐벗은 상처투성이었다.
평소에 늘 다짐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건 내가 갖고 있는 정체성에 관한 중요한 메타포들이고, 상황에 관계없이 유지하고 싶은 몇 가지 개인적 오리지낼리티이다. 그건 정확한 언어나, 한 문장으로 정리하긴 어려운 것이지만, 나에겐 매우 소중한 것들이다. 그건 누구에게나 형태와 의미를 달리하여 소중히 보듬어가고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중요한 메타포가 무너진 한 주였다. 감정적으로 조절에 실패했으며, 일상에 몰입하지 못했고, 그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다. 염세적이었고, 회의적이었으며, 육체와 정신이 의미를 모른 채 뒤엉켜, 오래된 아스팔트의 갈라진 틈처럼 무미건조했다.
내가 지금까지 글을 14년 동안 이어가며, 나를 붙잡으려했던 여러 노력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냥 내가 잘 살고 있다며 위안하기 위해, 겉만 번지르르한 포장지를 계절마다 내가 보기에만 그럴듯한 정물화처럼 바꾸어가며, 마음의 부패를 막아왔던 건 아닐까. 정신적인 침전은 새로운 생각을 하면서 전환할 수도 있고, 침전된 생각의 부유물을 정신적 우물 밖으로 꺼내면서 리프레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적으로 무너지기를
반복한다 해도 말이다.
어떤 생각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한다고 해도, 우리 마음엔 비워지지 않은 오래된 화석과 같은 고형물이 존재한다. 그건 어린 시절의 기억, 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기질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지금을 바라보는 가치관과 미래를 영위하는 가속페달의 형태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정말이지,
“난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아.”
라고 생각하고 싶다.
감정의 조절에 실패한 것은, 스스로 시간을 들여서 글을 써 가며 만들어 온 나만의 메타포가 꽤나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였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이 행동과 궤도를 달리하며 무너져도, 다시금 생각을 새롭게 하고, 후회가 되는 행동은 보람이 되는 또 다른 무엇으로 바꾸어야 하는 게 맞는 건 아닐까..
완벽해 지려고 사는 게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 양쪽의 노력은 결국 다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정신적으로 무너진 나 역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흠,, 방향를 바꾸어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다. 마음의 부침(浮沈)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임을, 그래도 그 어쩔 수 없는 것에 마음 아파하기 보다는. 빨리 주어진 상황을 나답게 사는 것이 필요함을 조금은 더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감정적으로 모든 일상의 순간을 추스릴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렇게나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닐까. 평생을 하나의 원칙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나는 인생을
한 가지 원칙으로만 살아가는 것으로
프로그램이 입력된
아바타도, 잘 훈련된 기계도 아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각자의 ‘인생 라디오’를 갖고 태어난다. 오토튠으로 맞추어진 주파수는 세상에 널려진 각종 그럴듯한 자본주의적 인생과 흐름을 같이 한다. 남들이 많이 청취한다. 인기 채널이 된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그 방송의 채널을 진행하는 DJ 가 행복해 질까. 남들이 듣기 그럴 듯한 멘트만을 내뱉어야 한다. 꽤 피로해진다.
그 ‘인생 라디오’에
'나만의 삶의 주파수'을 찾아야 한다.
억지로 찾으려는 강박에 시달리다 보니, 난 이번 주가 힘들었나 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니 더 쉽게 정신적으로 무너진 것 같다. 하루키의 태엽감는 새에 나오는 정신적 ‘우물’에 빠진 것만 같았다.
이젠, 오토튠이 아닌 ‘아날로그튠’의 주파수로 인생의 라디오를 조율해 보자.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은 나만의 주파수를 조심스레 찾아가보자. 인생의 전반에 걸쳐… 절대 의미 없이 끝나지 않을거다. 그러려면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스스로 인생을 위해 만든 법칙에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으려면, 스스로 인생의 일부를 허심탄회하게 흘려 보내는 '셀프-아이들링(SELF-IDLING)'이 필요하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순간을 인생에서 많이 만들어 갈수록, 난 기존 사회의 오토튠을 지나치고, 내가 만든 미지의 아날로그튠을 재조율하며, '나만의 인생 라디오'를 갖게 된다. 나만의 인생 호흡을 갖게 된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지 않을수록,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은 일상을 스스로 허락할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린 비로소,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인생을 좀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평범하게 산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