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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V피플 May 10. 2016

행복하지 말아요, 그냥.

우린 어릴 적부터 무언가에 익숙해져 있다. 최선을 다해라. 결과보다는 노력을. 성실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무언가가 보일 거다. 그렇게 우리는 의도치 않게 어른들의 기대치의 산물이 되려고 노력하면서 성장해 왔다. 그리고 스물 전후로 깨닫게 된다. 꽤 어설픈 누군가의 미성취된 푸념이였음을.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타인에 의해 투영된 무언가였음을.

아마 전세계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가장 쉽게 전세계를 돌아본 것처럼 짐작할 수 있는 건. 한국이 자기의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사느라 아둥바둥 한다는 것일 거다. 그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때가 되면 알게 되는 것이며, 그 ‘때’ 라는 것이 찾아와도 현실적으로 별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누군가와 다른 척 하지만 결국 똑같은 삶을 산다. 그리고 땅으로 스며 든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충고를 하고 싶어 진다. 나만큼은 다를 거야. 그래도 나는 누군가에게 다른 인생을 보여 줄 거야. 최소한 누군가에게는 꽤 합리적인 언어로 이 세상의 부조리를 설명할거야. 그래서 결국 우리는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은 높일 수 있는 거야..라고.... 하지만 전혀 바뀌지 않는다.

과연 그 이유가 뭘까. 학창시절엔 ‘최고보단 최선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안에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하지만, 결국 주변을 둘러싸는 것은 가족과 어설픈 친구들과 조잡한 사회적 미디어 투성이다.

그래서, 우린 결국 최선을 한다는 명분 하에 최고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것이 한국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과 유럽과 아시아 등등이라고 해서 뭔가 특별할 것은 없다. 결국 사람 사는 것은 거기서 거기다. 하지만 약간은 좀 더 유별난,,, 그 무엇이 누군가를 제한하고, 자기 스스로를 옳아 맨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게 상대적으로 더 힘겹다고 느낀다.

나를 위한 환상이, 결국은 타인의 불안감이나 못 다 이룬 상상을 힘겹게 채워 가는 것임을 30대 중반이 되서야 깨닫기 때문이다. 아무리 빨라도 20대 후반이다. 왜냐면 20대 중반까지는 모두들 획일화된 삶을 살기 때문이다. 고민할 시간이 없으니 생각이 떠오를 리 만무하다. 이미 무언가를 바꾸려 하기엔 늦었다. 그래서 그냥 자신답게 살아간다는 스스로의 자기 암시로, 본인 스스로 또 다른 족쇄를 채워 가며 그렇게 살아간다. 전혀 행복하지 않다.

물론 행복해 질 수는 있다. 몇 가지 생각을 바꾸고, 과감하게 직업을 바꾸고,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재설정하고, 인간관계를 전면적으로 되돌아 보거나, 새로운 사회논리에 눈을 뜨거나 하는 등으로…. 그렇지만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린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철 들었다는 미명하에 무언가 불편한 것들과 공존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더욱 제한적으로 느껴지는 무언가는 다른 데에 있다. 그리고 무언가에 대한 아쉬움은 최근 다양한 드라마와 여행의 소재로 드러나 있다. 그건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다. 시간여행을 희망하면서도 과거를 바꾸고 싶은 묘한 아이러니.. 드라마 ‘나인’, ‘시그널’, ‘응답하라 1988’,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건축학개론’까지..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과거에 대한 아쉬움은 더 이상 어느 곳으로도 나아가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다. 첫째는 내 스스로 실력이 생각한 것보다 부족하다는 객관적 평가가 20대 후반부터 시작되고, 둘째로 주어진 환경이 녹록치 않으며, 셋째로 각자가 하나 이상씩 갖고 있는 결정적 과거로 인해 나는 이미 ‘과거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다는 건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난 그냥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행복하지 말자고. 절망적인 염세주의적 선언이 아니라 아주 담백한 자기적 표현으로서의 비행복론. 결국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는 각자가 찾아내야 하는 것임을 알고서도 말이다.

행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고, 누군가의 기대치를 늘 충족시킬 필요가 없으며, ‘인생의 판단은 스스로 가능하다는 특별한 자유’에 눈을 뜨게 되면..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덤덤하게 몰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인생에 대한 자기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평가해도 소용없다는 것이, 행복을 척도로서 수치화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남이 바라보는 성공에 물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가. 그 순간 비로소 행복이란 단어가 머릿 속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아주 편안한 기분이 된다.

행복을 떠올리기 이전에, 내 맘 속에서 조용히 읇조리고 싶은 그 무언가를 말로, 텍스트적으로, 사회적으로, 직업적으로, 사회관계적으로 풀어 가는 게 중요하다. 애초에 매일 매일 행복하다는 것 자체가 인간의 4대 감정인 희로애락을 무시한 처사이며, 꽤 편견에 갖힌 생각이란 건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걸 깨닫는 순간 더 이상 아둥바둥하지 않는다. 난 자유롭기 때문이다.

행복, 최고, 최선, 결과, 과정 등의 단어는 인생을 제한할 뿐이다. 내가 지금 하는 무언가로 행복해야지, 내가 이룰 무언가를 임의로 상상하며 현실과 착각하는 것으로 행복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행복을 내려놓을수록 행복해 지는 길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선 건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결국 내가 나를 혼자서 평가하며 생을 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의도치 않게 행복하지 않아도 되니,,

행. 복. 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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