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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V피플 May 17. 2016

개인문명, 그 공격과 방어.


휴, 하는 한 숨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반복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국인 이전에, 한 사회의 구성원이고, 그 이전에 어떤 회사에 다니고, 그 이전에 누군가의 아빠, 엄마이고, 누군가의 아들, 딸들로, 친구의 또 다른 친구로 살고 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자유로운 척을 해 봤자, 우린 결국 어딘가에 소속될 수 밖에 없는 ‘프레임의 사회’에 살고 있다.

해외 여행을 가면 좀 더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숙소를 잡고 루트를 정해 트랙킹을 하고, 돌아오는 길엔 꼭 쇼핑을 해야 하고, 남들 다 가 본다는 명소엔 꼭 한 번 들러야 어딘가 후련한 기분이 된다. 남들이 여행 뒤에 물어볼 것들에 대해 미리 신경 쓰고, 사진도 꼭 남겨야 무언가 나다운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다.



원하던 학교에 들어가면, 연봉이 많은 회사에 다니면, 꿈에 그리던 이성을 만나면, 복권에 당첨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우린 몽상 아닌 망상을 하고, 그 중의 일부는 실현되긴 하나, 여전히 다른 형태로 답답한 마음이 앞서고 이유도 모른채 허탈하고도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 나이를 먹으며 체력은 왜 이리 하향 곡선을 그리는지 짜증도 나고, 주말이 되면 여유로울 것 같지만 먹먹한 기분이 된다.

  예전 썼던 글에서, 한국이란 사회는 참 특이하고, 남의 눈을 의식하며, 결과로서만 모든 것이 평가되는 답답한 울타리라는 논지의 맥락을 수 차례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면, 먼가 그럴 듯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할 새로운 환경을 만났다면, 일생일대의 소중한 인맥을 형성했다면 달라졌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린 여전히 또 다른 문화를 추종하고, 불평불만을 늘어 놓으며,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게 될 것이다. 표현하는 방식, 경험하는 방식이 조금 더 달라지고, 남이 보기에 조금 더 수월해 보이거나 새로워 보이는 정도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다. 큰 프레임에서의 맥락은 같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20년전의 나, 10년 전의 나, 지금의 나, 10년 뒤의 나는 여전히 동일한 나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외모나 주름의 굴곡, 체격, 체중만 조금씩 다른 형태로 변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게 전부일까? 진실이기 전에 실체가 있는 생각이기나 한 걸까?

 바로 그 생각 때문에 당신은 오늘도 불행이 행복보다 앞선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제 솔직하게 인정을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 보자.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분명히 다르다. 동일한 몸과 정신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분명히 하루하루가 다른 나를 맞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평소에 자신이 꿈꾸는 자기다운 모습이 있다. 듬직하게 누군가에게 의리를 지킨다거나, 하는 일에 있어 철두철미하게 완벽을 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늘 부드럽게 대하고 절대 화를 내지 않는다거나, 인간미를 갖춘 나를 꿈꾼다거나…

 그러한 나의 여러 가지 모습 중, 열 가지의 나답다고 생각하는 기질이 있다고 해보자. 그 기질 중 어떤 날은 1번을 꺼내 들고, 다른 날은 4번을 꺼내서 하루를 보내는 나를 발견한다. 나 스스로 객관화 해보자는 얘기다. 어떤 나를 드러내든 여전히 같은 나인걸까?



어쩌면 그 두 가지의 나는 다른 내가 아닐까. 숨쉬고 살아가는 몸뚱아리가 하나인데, 정체성도 하나이고, 김 아무개라는 사람이 세상에 어떻게 둘 일수 있냐라는 논리로 보자면 당신의 생각이 맞다. 하지만, 그래서 무엇이 달라질까? 하루키 소설에서처럼 100년 뒤엔 과연 무엇이 남는 걸까? 무언갈 쌓아가려 해선, 과거의 누적만이 모든 걸 설명한다는 듯 결과의 논리에만 집중해선,,, 허무해지는 마음의 시간이 빨리 찾아올 뿐이다.

우린.. 결국 원하는 의도를 갖고 태어난 게 아니고, 숨이 멈추는 순간을 알지 못한다. 즉, 정체성이라는 본질적인 고민을 해 봤자, 어떤 결과를 만들어서 나를 다시금 곱씹어 봤자, 나는 그냥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 불변의 법칙과도 같은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을 반복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나만의 아이덴티티라고 할 만한 생각의 꼬리를 이어 붙인들 무엇이 달라지는가.

 좀 더 극단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내가 아침에 일어나고 한 회사에 출근하여, 저녁에 예전부터 눈여겨보던 소박한 맛집에 가서 식사를 하고, 애인과 영화를 보며 데이트를 하다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에비앙 물 한 병을 사고, 또 잠시 멈추어 어제 발간된 만화책을 빌려서 집으로 터벅터벅 거리는 것이 더 나답지 않은가?



나는 나다워야 한다는 논리의 핵심은 결국, 스스로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결과를 만들어 낸다기 보다는, 순간순간 하는 생각이나 행동 자체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말이다.

 결과로서의 나, 지위나 명성으로서의 나, 성과로서의 나, 남들이 바라보는 나는 결국 실존의 내가 아니며, 숨쉬고 있는 나의 또 다른 변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제의 나보다, 아직 찾아오지 않은 내일 아침의 나보다, 지금 이 순간 나답게 살아가는 생각과 행동으로서의 그 무엇이, 그 방향성의 ‘라이프 모멘텀’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당신이 다니는 회사를 ‘오늘도’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전부터 만나던 여자와 ‘오늘도’ 아직 헤어지지 않고 만난다면, 그건 무언가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을 더 해봤자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는 쳇바퀴의 연속이 된다. 정말 정체성이란 것을 형성하고 싶다면, 내가 태어나면서 갖고 있었던 몸뚱아리, 그만두지 않는다면 아직 그대로 있을 사회에서의 소속, 인간관계 등은 그냥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는 논리로서 삶을 마주하고 지금 이순간에서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보는 건 어떨까?

 쉽게 말해, 어제 달성한 수주 계약보다, 지금 이순간 모든 게 불확실한 채 외근을 나가는 내가 나답고, 외근 뒤 돌아오는 길에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더 나를 닮아있다는 얘기다. 내일의 에스프레스보다 더더욱.


 스치듯 지나간 삶의 흔적을 다시 곱씹어 보고, 스스로 과거의 영광스러운 자신에 기대려 하는 생각의 생각들은 얼마나 나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일까? 그게 과연 의미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이어가려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자존과 푸념과 무의미한 생각의 피드백을 반복하는 것일까?

더 젊으면 무언가 대단한 걸 할 것 같지만 아직 무언가 관점이 영글지 않아 무엇을 해야 할 지 그 순간은 모른다. 나이가 든다고 더 깨달아질지 모르지만, 몸은 쇠약해 지고 있다. 돈과 지위와 인맥이 확보되면 좀 더 존경을 받고 그럴듯하게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지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면 또 다른 생각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시간의 흐름이 더 나다운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다시 처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우린 지금 이순간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의 생각과 아이디어의 새로운 프레임, 행동의 또 다른 틀, 지금의 정체된 내가 아닌 되고자 하는 나의 행동으로서의 프레임이 더욱 중요한 지도 모른다.




 특정 주제에 대해 주장을 강하게 하고 화를 내면 더 내 안의 나를 드러내어 나다워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면 비난을 아끼지 않고, 그나마 손에 한 줌 쥐어진 어설픈 지위와 권력으로 상대방을 압도하려 한다. 세상은 원래 다 그런거라 설파를 하며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러곤 꽤나 교양있는 취미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수십년에 걸쳐 만나는 오래된 친구만큼은 변함없이 나를 인정해 줄거라 생각한다. 그리곤 마음 한 구석에 괴리감이 생긴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하고 있느냐 생각해야 하지만, 지금 갖고 있는 기질을 전부 드러낸다 해서 나다워지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최적의 비율을 찾아 새로운 패러다임과 생각의 프레임 속에서 유효적절하고, 좀 더 나다울 수 있는 지향점의 내가 있다면 지금의 나와 적당히 콜라보할 줄 알아야 한다. 행동 또한 마찬가지다. 난 그러한 생각과 행동의 조합을 하나의 ‘개인문명’이라 부르고 싶다. 누구에게도 소속되기 이전에 지금 이 순간의 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나다움…. 사회적으로 어떻게 보이던 간에…



 한국사람이 불행한 서두에서의 논의가 갖는 골자는, 개인문명을 방어하면서 나다워지려고 한다는데 있다. 돈을 벌고 그럴듯한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뒷받침 되면 개인문명이 방어되고, 남들이 나를 인정하는 속에 나다워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늘 고립되어 있고, 소통이 없다. 여전히 나다움을 드러내기 직전의 껍질은 깨지지 않고, 본인의 자기답지 않음으로 인한 외로움을 방어기제로서 표현한다.

 개인문명의 ‘공격’은 그래서 유효하고 의미있다. 사전적 의미로 쓰는 공격이 아니다. 남을 공격하고 피해를 주면 내 개인은 얼마든지 표현되어도 좋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나다울 수 있는 지를 생각하다보면 누군가의 시선에 흡수되지 않고, 스스로 공격(방어와는 다른 방향성의 의미)루트를 찾고 적극적인 삶을 산다는 점이다. 내 스스로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콜라보의 에너지가 삶의 원동력이 되니, 무엇을 해도 생각만큼 피곤치 않다.



한 사회에 100명이 살면 100개의 욕망과, 기질과, 부딪힘이 존재한다. 오히려 남이 욕망을 뿜어낼 때 화를 내기보단, 그러한 욕망을 가만히 관조하고 스스로의 길을 나만의 보폭으로 산뜻하게 걷는 것이 나다움인 것이다. 똑같은 문제에 대해 누군가는 화를 내고, 또 누군가는 자기다움의 길을 찾아 신속히 그 ‘화’라는 마음 숲을 떠나 오롯이 나만의 개인문명의 숲으로 떠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겨우 타인의 삶만을 살던 지난 날에서 벗어나, 한 개인의 문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 개인문명은 숨이 멎을 떄까지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알 수도 있다. 때로는 누군가 알아주는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개인문명이란, 남을 인식하지 않고 나에게 집중함으로서 나타나는 삶의 여유이자 자연스러운 일상의 떨림이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아도 좋다.



 그건 누군가에게 무엇이기 이전에 나 스스로 인정해야만 하는 나만의 문명이며,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아직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과 방향성이 어설프거나 가려져 있을 뿐… 누군가 나를 몰라줬다고 슬피 울 것이 아니라, 다음주면 너도 나도 잊어버릴 어설픈 잣대와 평가에서 벗어나,,, 나만의 개인문명을 하루하루, 그리고 지금 이순간 만들어 가다보면 어느새 나는 ‘지금’을 살게 된다. 숨쉬는 호흡이 자랑스럽고 신이 난다. 버티는 삶이 아니라, 나 아니면 안 되는 모습으로 살다보면 어느새 그럴싸한 단 하나의 문명이 하나 만들어 진다. 삶의 덫은 어느덧 명쾌하게 삶을 꿰뚫는 프레임으로 전환된다.

 그 소중함과 격한 설렘이 바로 개. 인. 문. 명.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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