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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V피플 May 19. 2016

‘직업’과 ‘취미’에 관한 단상.

좋아하는 일/잘 하는일/돈 버는 일


오늘은 조금 편안하게 담론을 펼치고자 한다. 내 생각을 남에게 전달한다는 것만 큼 쉽지 않은 것이 없다고 느끼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무언가 풀어내고, 글로 표현해 보고 읽어주는 단 한 명을 위해 텍스트의 형식을 빌리는 것은 자기만족에서 벗어난 ‘글쓰기’의 과정이 아닐까.




‘직업’과 ‘취미’에 대해 한 번 이야기해 보자.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보수의 유무’를 우선 떠올려 볼 수 있다. 일정한 보수가 있고 스스로 자신의 일상에 중심에 설 만한 무언가를 직업으로 불러도 좋을 법하다.

또 무엇이 있을까? ‘전문성’에 관한 관점도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기술과 남다른 실력을 바탕으로 무언가 해나간다면 또한 직업에 가까운 기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떠올려 보자면, ‘잘 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해야 한다는 주변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과 잘 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여, 전자는 취미로 남겨두고, 후자를 기반으로 삼아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사회적인 인정’이나 ‘경제적인 보수’ 또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남을 인식하는 것을 꽤나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는 한국이란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 사회적 통념과 인식이란 사회구성원으로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현실감각이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이 모든 것을 잠시 내려 놓고 자유로운 생각의 전환을 해보고자 한다. ‘직업’과 ‘취미’를 구분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는 얘기를 요지로 무언가 나누어 보고 싶다.



한국 사람들은 묘하게도 직업에 있어 ‘정통성’을 중시한다. 거기서부터 생각의 고리타분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의사가 되려면 의대를 나와야 한다, 법조인이 되려면 법대를 나와야 한다. 그래서 의학전문대학원이나 로스쿨이 생기면 어딘가 모르게 심기가 불편하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의 탄생과 시스템, 교육기관의 재조명을 심도 있게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은 자신이 꼭 직업이나 취미로 갖지 않는 부분까지 관여하며 정통성 논의에 열을 올린다.

이것은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와도 연결된다. 어느 고등학교 출신이지만, 비평준과 평준화를 졸업년도로 구분하여 별도의 모임을 갖는다. 정통성에 있어 큰 기조를 이어나갈 사람끼리 새로운 그룹을 형성한다.



처음엔 나만이 소속된 그룹이 있고 커뮤니티가 형성되니, 무언가 동질감도 생기고 강력한 사회적 방어벽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때론 우쭐해 지기도 한다. 어느 정도의 소속감은 사회활동에 꽤 필요한 부분이다. 구심점을 만들어 주고, 이탈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을 하는데 있어 제약을 받는다. 자율성이 배제되고, 창조적인 영감이 무시 당한다.



흔한 예로, ‘가수가 배우를 한다, 개그맨이 노래를 한다, 등’의 케이스가 있다. 기존 집단에선 새로 온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실력이 없거나 아마추어적인 모습이 보이면 가차없이 신랄한 평가를 한다. 대중 또한 이에 질세라 얄팍한 댓글로 브라운관을 떠나라는 둥의 의미도 없는 폄하를 이어간다.

솔직히 상관없지 않은가? 가수를 좋아하는 팬이 있으면, 그 가수가 연기를 하는 모습도 보고 싶을 것이고, 토크쇼에 나와서 진행하는 모습 또한 참신할 것이다.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애정과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미디어의 결과물은 결국 대중의 관심에 응수하여 만들어지는 수요-공급의 법칙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수요가 있는데 정통성 운운하며 고집을 부리는 것 또한 고루한 자기방어이지 않는가?



단지, 지양해야 할 것이 있다고 본다. 가수가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연기를 배우려고’ 하거나, ‘처음이니 점차 나아진다는 모습을 보일 테니 애정을 갖고 지켜봐 달라’는 응석 부리기는 따끔한 비평을 할 필요가 있다. 충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프로패셔널한 모습으로 내공을 쌓은 후, TV 화면을 할애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사회구성원이 직업을 갖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되는 암묵적인 약속이다.

정통성보다는 ‘실제적으로 필요한 SOCIAL NEEDS에 맞추어 오퍼를 던질 수 있고, 적절한 OUTPUT을 낼 수 있는 사람’이 갖게 되는 것이 바로 ‘직업’이다. 그것이 아니면 ‘취미’로 두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의사를 하면서도 ‘의학전문기자’를 한다던지, 변호사를 하면서 집단토크쇼에 출연하여 대중이 알기 쉬운 언어로 법률용어를 설명하며 사례분석을 한다던지 하는 것 또한, 사회나 대중의 욕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키워가며 커리어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 특별한 보수를 받지 않거나, 자발적 동기에 의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재능기부’라고 할 수 있다. 재능기부 또한 기분 좋은 사회적 환원이 되겠지만, ‘직업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고리타분한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적절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불가피하게 ‘재능기부’의 형태로만 다른 영역으로 뛰어드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가라는 것이 점차 큰 의미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들 무언가 남기고 싶어하기 때문에 ‘타이틀’을 좋아한다. 나는 어떤 직업을 갖고 있으면 그에 대한 명함이 필요한 것처럼 자신의 VALUE를 직업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 ‘신분’과도 직결시켜 사회적인 위치를 좀 더 확보하려고 꽤나 열심인 것만 같다.



하지만,, 진실은 결국 자기자신만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마음이 가는 대로 마음껏 이것 저것 해보면 된다.

직업이 여러 개이면 어떠한가. 자신의 소중하고도 순수한 열망을 인생의 일정한 시기에 뿜어내는 것은 직업과 취미, 그 어떤 형태로도 표현될 수 있다. 단, 그것이 영속성을 갖기 위해선 일정 수준의 ‘직업’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고, 이는 사회의 특정 부분에서 필요로 하는 욕구를 채워줄 수 있으면 된다. 이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희소성을 가질수록 그 직업에 대한 보수는 높아진다. 사회적인 인정은 좀 더 별개의 것이긴 하지만, 연장선 상에 있는 경우가 많다. 금상첨화의 실타래에 많은 구슬을 꿸수록, ‘직업의 뒷심’이 생기는 법이다.



우리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일단 직업이 있어 다행이라고 할 때, 다른 모든 관심과 욕구는 취미로 머무를 것인가? 언제 어떤 기회로 자신이 뿜어낼 수 있는 분야가 생길 지 모를 일이다.

취미가 직업으로 바뀌는 것을 고리타분한 보수의 유무로 평가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전문성을 가진 취미를 다양한 형태로 표출할 수 있는 내공을 끊임없이 갖추어 나갈 때, 인생의 기회가 생기고 새로운 인생열차로 갈아탈 수 있게 된다.



단지 하나의 티켓만 가지고 ‘인생열차’의 종착역’까지 가려고 하는가? 놀이동산만 가도 여러 티켓을 끊어두고 시간대별로 이용을 하는데 나만 낡은 기차표 하나로 인생을 즐기려 한다면 진짜 무임승차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취미로 가질 수 있다, 또한 다양한 직업을 동시에 가질 수도 있다. 사회적 욕구에 대응할 만한, 취미가 많은 것은 얼마든 지 직업의 범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의미다.

당신은 인생에 있어 몇 개의 유효티켓을 갖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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