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리왕 May 22. 2021

[후쿠오카] (Fukuoka)

Directed by 장률, 2019

 헌책방 주인 제문(윤제문)과 유일한 손님인 소담(박소담)은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난다. 후쿠오카에는 제문의 학교 선배인 해효(권해효)가 선술집을 하며 살고 있다. 제문과 해효는 28년 전 같은 연극반의 여자 후배인 순이를 두고 삼각관계를 이룬 과거가 있으며 이에 대한 앙금과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제문과 해효는 서로를 두고 꼴도 보기 싫다고 말하지만 어째서인지 소담을 매개로 여정을 함께 한다. 제문과 소담은 후쿠오카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며 제문과 해효 사이의 이야기에 대해 더 알아간다.


 영화는 비선형적인 플롯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야기의 흐름이 서로 아귀에 맞지 않고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부각되기보단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로 영화를 이끌어간다. 뒤죽박죽의 이야기에는 수렴하는 지점 또한 없다. 후쿠오카는 제문과 해효가 동시에 사귀었던 후배의 고향이지만 인물들은 그녀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또는 심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는다. 영화 '후쿠오카'는 후쿠오카를 도화지 삼아 인물과 이야기를 불규칙한 리듬으로 뿌리는 일종의 액션 페인팅과도 같다. 으레 비선형의 영화들이 그렇듯 '후쿠오카' 역시 꿈결 같은 분위기가 일관적이다. 이야기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논리나 목적도 없다. 제문과 해효의 잠재의식을 무작위로 이야기 위에 끌어와서는 함께 체험할 뿐이다. 이 과정은 인물들이 서로를 더 알아가는 동시에 인물들의 분별을 흐리게 한다.


 흐리고 불명확한 이야기 속에서 징명한 사실 하나는 소담의 역할이 바로 영매(靈媒)라는 점이다. 영매는 만날 수 없는 두 존재를 소통케 한다. 소담은 28년간 단절된 상태였던 제문과 해효를 만나게 하고 말문을 트게 한다. 그러나 그녀의 역할은 단순히 이야기의 이음새로 끝나지 않는다. 소담의 역할은 분리된 세상을 연결하는 것을 넘어 분리라는 개념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세 명의 주요 인물 중 가장 먼저 극 중 이름이 밝혀지는 인물은 소담이다. 그녀의 이름은 그 역할을 연기한 배우 본인의 이름과 같다. 이 지점에서 배역과 배우의 구분, 텍스트의 안과 밖이 무너진다. 후쿠오카에서 그녀는 외국어 화자들과 서로의 모국어로 대화한다. 그녀를 필두로 제문과 해효 역시 외국어를 번역 없이 이해하고 무리 없이 소통한다. 그녀의 소통은 고국과 외국, 내집단과 외집단의 경계를 지운다. 마지막으로 세 사람이 방문한 서점에서 서점 주인 유키(야마모토 유키)는 소담을 보고 2년 전에 와서 인형을 맡기고 갔던 사람이라며 그녀를 알아보고 기억한다. 소담은 후쿠오카에 처음 왔다고 말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시퀀스에서는 유키의 증언대로 그녀가 인형을 쓰다듬으며 노래를 부른다. 소담의 존재는 과거와 현재의 구분마저 뒤섞으며 마침내 이 영화를 꿈으로 보아야 할지 현실로 보아야 할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영화가 특히 주목하는 경계선은 바로 제문과 해효의 관계다. 해효의 선술집 벽에는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붙어있다. 소담은 제문과 해효를 두고 닮았다고 거듭 말한다. '둘이 비슷하기 때문에 순이가 동시에 좋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랜 단절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순이'라는 같은 핵심을 공유한다. 순이가 남긴 추억과 상처는 두 사람에게 공통적이다. 더 나아가 그들은 점점 같은 기억을 두고 누구의 기억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다. 제문과 해효는 거듭 서로를 거부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를 잃고 동화되어간다.


 영화가 절정에 도달하는 순간은 바로 정전된 가게에서 세 사람이 연극을 하는 장면이다. 소담은 자신이 순이 역할을 할 테니 제문과 해효에게 28년 전을 떠올리며 연극을 해보자고 한다. 소담은 이야기 안에 이야기를 생성하고 제문과 해효의 기억 속 사실에 마음속 바람을 첨가함으로써 인물들에게 내재한 층위를 한 단계 더 허문다. 그들은 홀린 듯 몰입해 28년 전의 마음으로 대사를 뱉는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결론에 도달하려는 순간, 허무하게도 연극은 끝나버린다. 영화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 시퀀스는 보는 이에게도, 인물들에게도 너무 짧다. 연극이 끝나고 헛헛하면서 민망해진 그들의 표정은 꿈에서 깨어난 이의 그것과 비슷해 보인다.


 영화는 소담이란 인물의 수미상관이다. 그녀의 제안에 영화는 출발하고, 그녀의 전화가 영화를 닫는다. 영화 속을 종횡무진 누비는 그녀는 분명 빛난다. 다만 소담이라는 인물의 상투성이 마음에 걸린다. 중년의 남성을 상대로 거리낌 없으며 성적으로도 조숙한 소녀의 코드는 관객에 따라 '시대착오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인물을 이미 여러 매체에서 자주 보았으며, 그 매체들은 진작에 구시대로 흘러갔다는 뜻이다. 더불어 소담은 교복을 입는 성인 여성이다. 이런 설정에는 '경계의 혼선'이라는 영화를 관통하는 제재와 분명 연관이 있을 테지만, 그 이상에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다. 이런 소담의 특징은 제문과 해효에게 잡담거리가 된다. 제문과 해효는 소담을 두고 이성으로서 어떠한지 얘기한다. 그들의 대화는 이후의 관계를 암시하거나 인물의 내면을 조명하는 말이 아니다. 그저 소담을 소모할 뿐이다.


 과거와 현재, 사실과 허위를 칼 같이 구분 지으며 살아가려는 우리에게 '후쿠오카'는 한 숨 낮잠이 되어 날 선 정신을 가라앉힌다. 90분이 채 안 되는 짧은 러닝 타임 동안 관객과 인물들은 같은 꿈을 꾼다. 해효의 선술집에서는 들국화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가 흘러나온다. 우리는 아침이 밝아오면 꿈을 잊어버린다. 제문과 소담은 한국에 돌아오면 후쿠오카를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관객은 객석을 떠나면서 영화의 내용을 떠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후쿠오카'는 그런 사실에 개의치 않는다. 애초에 꿈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면 어떤가. 또 어느 것도 알아내지 못하면 어떤가. 애초에 꿈이 그렇듯, 우리의 나날도 그런 것일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동사서독 리덕스] (Ashes of Tim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