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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Jun 12. 2021

[늑대와 춤을] (Dance with wolves)

Directed by 케빈 코스트너, 1990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중위 존 던바(케빈 코스트너)는 죽기로 마음먹고 전장으로 뛰어들었지만 되려 이 행동이 공이 되어 원하는 곳으로 배치받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전투에 지친 그는 서부로 자원하여 세지윅 요새로 배치된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요새는 이미 버려지고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설상가상 그를 요새로 보낸 상관과 요새까지 이송한 농부 모두 죽어버린 탓에 아무도 그의 소재를 알 수 없게 되고 그는 미개척된 서부의 초원에 고립된다. 요새에서 홀로 살아가던 그에게 초원의 원주민 '수우족'이 찾아온다. 존 던바와 수우족은 서로 경계하지만 이내 적의가 없을 깨닫고 소통을 시도한다. 존 던바는 수우족의 삶을 직접 바라보며 원주민에 대한 자신의 통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삶에 참여한다.


 영화는 존 던바 중위가 부상 입은 다리에 억지로 군화를 신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존 던바가 억지로 군화를 신으려는 이유는 그의 부상당한 다리가 절단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그는 다리를 지키기 위해, 혹은 다리를 잃을 바엔 차라리 목숨을 잃는 게 낫다는 생각에 전장으로 몸을 던진다. 그의 행동 동기는 일종의 거세 불안이다. 존 던바는 기득권의 표상에 부합한다. 백인이며 남성이고 명령권이 있는 군의 장교다. 만약 다리를 절단한다면 그는 더 이상 기득권의 표상에 부합하지 않는다. 존 던바의 세상은 전시 상황이며 전쟁 중에 장애는 배제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중위 존 던바가 '늑대와 춤을'이 되는 과정에서 그는 군복과 총기를 수우족과 나눈다. 전시 상황에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힘과 권위를 포기함으로써 그는 전쟁의 밖으로 걸어 나온다. 영화는 존 던바가 첫 장면에서 그토록 사수하기 원했던 가치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방향으로 전진한다.


 수우족으로부터 존 던바는 새삼스러운, 그러나 전혀 지켜지지 않는 세상의 규칙을 배운다. '머릿속의 바람'은 중위의 모자를 가지려는 부족원에게 '하나를 가지려면 네 것 하나를 주어야 한다'라고 꾸짖는다. 포니족과의 전투를 보고는 그들이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겨우내 먹을 식량을 지키기 위해 싸웠을 뿐'이라고 일기에 적는다. 말 그대로 '이치'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수우족 외부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존 던바가 농부의 수레를 타고 요새까지 이동하는 동안 농부는 그에게 '인디언은 다 도둑이거나 거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도둑질도, 구걸도 한 적이 없다. 그들은 오래도록 땅의 주인으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졌으며 무언가를 훔칠 필요도 없었다. 농부의 혐오 섞인 말은 되려 백인들을 지적하는 반어가 된다. 수우족은 여자와 아이, 겨우내 먹을 식량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반면, 백인들은 자격 없는 소유와 재미를 위해 타자를 공격한다. 진짜 도둑과 거지, 괴물이 누구인지 영화는 명백하게 지목한다. 영화는 서부극의 대표적인 결말을 차용하여 막을 내린다. 자신이 구해낸 세계에 속하지 못하고 서부로 떠나고 마는 주인공의 뒷모습, 떨군 고개가 '늑대의 춤을'의 마지막이다. '우리는 영원한 친구냐'라고 묻는 머릿속의 바람에게 늑대와 춤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원주민의 의복을 입어도 태생적인 의복은 백인인 탓에, 그는 미합중국 육군의 중위 존 던바로서 침묵한다. 원주민들은 공평하려 했고, 정당하려 했으며 마지막 순간엔 우정을 요구하지만 그 어느 것도 이뤄지지 않았다.


 영화는 정확하게 '아(我)'와 '비아(非我)'를 나눈다. '아'는 수우족 일동과 존 던바이고, '비아'는 포니족과 백인 전체다. 이 구분은 너무 철저해서 '아' 속의 '비아'나 '비아' 속의 '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수우족은 전적으로 존 던바를 수용하며 외부의 백인들은 일말의 자비도 없다. '아'는 전적으로 선의로 움직이며 '비아'는 오직 악의뿐이다. 고정관념을 부수기 위한 연장으로 또 다른 고정관념을 등장시키는 셈이다. 이런 구도는 3시간이 넘는 긴 서사를 직선적으로 돌파하는 힘이지만 동시에 그 직선의 입체감을 저해한다. '늑대와 춤을'의 이야기는 착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핍박을 받는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가 벌어지는 이유는 그저 나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역사 속 인종 문제를 다루는 180분 대작의 깊이치곤 얕으며 첨예함은 떨어지는 자세다. '늑대와 춤을'은 어려운 주제와 쉬운 문법을 동시에 택함으로써 비판에서는 멀어지고 대중성과는 가까워진다. 이런 선택은 보기에 따라 영리하거나 비겁하다. 이런 탓에 영화를 재미있게 감상하고 문제의식에 공감하면서도, 이 영화가 '꿈의 공장' 할리우드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공산품'에 불과하다는 꺼림칙한 생각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매체 속에 등장하는 선역에겐 쉽게 호감을 느끼고 악역에겐 쉽게 분노하지만 그들을 내면화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종 문제와 타자화는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 '늑대와 춤을'을 우리 모두의 문제로 의식하고 고민하기에는 인물들이 너무 착하고 너무 악하다. 우리에겐 더 불완전하고 더 고뇌하는 인물들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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