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ed by 나카타 히데오 (2001)
'검은 물 밑에서'는 집 안에 물귀신이 나온다는 설정으로 기존의 관습을 비틀 뿐만 아니라 이야기에 부조리를 더한다. 영화는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을 공포의 바탕으로 바꾼다. 더군다나 그 공포는 바로 익사에 대한 두려움이다. 주인공 모녀는 부조리하게도 주택가 한가운데에서 익사의 공포를 느낀다. 거시적으로는 수십여 명의 사람들과 한 건물을 공유하면서도 인간 소외를 경험하는 아파트가 부조리하다. '검은 물 밑에서' 속 공포는 산업화와 도시화, 핵가족화의 산물이다. 이 모든 변화는 기존의 관습과 사회가 비틀어진 모습이기도 하다. 애초에 감독이 영화를 작정하고 비튼 것도 맞지만, 비틀린 사회를 영화에 담다 보니 영화가 비틀어진 격이다.
영화에는 책임이 부재한다. 부부의 이혼, 누수를 수리하지 않는 관리인 등 무책임의 순간들은 영화 전반에 중첩되어있다. 가장 결정적이고 반복되는 무책임은 유치원에 홀로 남는 아이의 모습이다. 이 장면은 엄마 요시미(쿠로키 히토미)와 딸 이쿠코(칸노 리오), 그리고 윗집 소녀 모두에게 공통으로 나타난다. 책임의 부재가 유기의 순환을 낳는다. 엄마가 경험한 유기가 딸에게 행해지고 윗집 아이가 겪은 유기가 아랫집 아이에게도 벌어진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안타까운 상황은 위에서 아래로 수렴한다. 대부분의 공포 영화는 주인공과 공포의 대상이 서로 대립의 구조를 이룬다. 반면 ‘검은 물 밑에서’ 속 엄마와 딸, 그리고 윗집 소녀는 서로 병렬 구조에 가깝다. 서로는 서로를 대변하고 투영한다. 비 오는 날 유치원에 늦게까지 홀로 남은 아이의 이미지가 번갈아가며 등장할 때 그 아이는 엄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며 실종된 윗집 소녀이기도 하다. 이 셋은 공포에 있어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이루지 않는다. 서로 층위를 공유하며 번갈아 같은 두려움에 떨 뿐이다.
영화 '검은 물 밑에서'가 보여주는 참된 공포는 인간이 귀신에게 당하는 해코지가 아니다. 진짜 공포는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이다. 진짜 공포는 남편 없이 아이를 홀로 키워야 하는 현실이다. 영화는 끝내 요시미의 공포를 해결해주지 못한다. 이쿠코에게 연결된 유기의 사슬도 끊어내지 못한다. 여타의 페미니즘 영화들이 '연대'를 부르짖을 때 '검은 물 밑에서'는 공포영화로서 담담하고도 숙연하게 연대 불능을 표현한다. 책임이 없고 분열과 왜곡이 만연한 세상에서는 부모마저도 아이를 지킬 수 없다는 게 '검은 물 밑에서'가 내리는 암담한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