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rected by 반종 피산다나쿤 (2021)
영화는 태국 이산 지방에서 바얀 신을 모시는 무당 ‘님’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님은 이 지역의 무속 신앙에 대해 설명하며 영화의 초석을 놓는다. 이때 인터뷰어는 '빙의가 되면 몸이 덜덜 떨리고 목소리가 변하냐'라고 질문한다. 이에 님은 웃으며 '테레비를 너무 많이 봤다'라고 답한다. 이 같은 대사를 통해 관객은 영화가 보여줄 엑소시즘의 비주얼은 여타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태국의 무속신앙이라는 낯선 주제와 이를 조명하는 이국적인 인서트가 이런 기대에 부채질을 더한다. 그러나 '랑종'이 보여주는 빙의의 모습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안색이 안 좋아지며 괴성을 지르고 기행을 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는 수려한 연출 일지 모르나 관객이 기대한 생경함은 아니다. 아무리 잘 연출한 시퀀스가 있어도 앞선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는 감점이다.
영화는 공간과 사건의 미지성을 백분 활용하며 차분히 공포를 쌓아 올린다. 그러나 어떤 조급함 때문이지 영화는 중반을 넘어갈 때부터 작위적인 점프 스케어로 스스로 쌓아온 장르적 형식을 포기해버린다. 퇴마 의식의 실패 이후 공격당하는 카메라맨의 모습을 꾸역꾸역 전시하는 장면 역시 모자란 잔혹성을 보충하려는 시도처럼 보일 뿐이다. 영화는 관객을 충분히 겁주고 있지 못하다는 의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타협을 선택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힘들게 유지해 온 톤 앤 매너를 폐지하는 리스크를 안는 대신 관객에게 쉽게 겁을 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 이 같은 단발적 놀래킴이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문답이다. 이야기는 보통 첫머리에 질문을 던지거나 과제를 내주며 시작한다. 그리고 관객은 인물들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가 영화가 어떤 답을 쥐어줄지 기대하며 서사를 따라간다. 영화 '랑종'은 보기에서 오답을 소거해나가며 답을 추려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랑종'의 서사가 관객에게 던지는 수수께끼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밍’에게 찾아온 악의 정체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악을 이길 방법이다. 악의 정체에 있어서 처음에는 조카 밍의 증상을 바얀 신에 대한 신병으로 봤으나 이는 오답이었다. 님은 오답을 지우고 밍의 죽은 오빠 '맥'에게서 이유를 찾지만 이 역시 소거된다. 이렇게 밍의 고통을 설명하는 보기는 하나씩 지워진다. 밍을 악으로부터 구해내는 과정 역시 소거의 연속이다. 밍을 구원할 수 있는 인물이 님인 줄 알았으나 이도 오답이었다. 님의 퇴장 이후 그 역할은 '싼티'에게 옮겨간다. 그러나 그도 정답이 아니었다. 이렇게 영화는 소거에 소거를 거듭하다 결국에는 관객에게 백지를 제출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영화는 애초에 질문이 틀렸다고 고백한다. '랑종'이 펼치는 세계에서 보기 중에 답이 있을 거라는 순진한 발상은 오류다. 우리는 문제를 이해할 수 없고 보기를 가려낼 재주가 없다. 영화는 인물과 관객이 답을 갈구하며 함께 쌓은 공든 탑을 '모른다'는 말로 한 숨에 흩어버린다. 그러나 이 '모른다'는 말은 무책임보다 책임에 더 가깝다. 인간에게 있어 악과 고통을 설명하는데 '모른다'는 말 외에는 모두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 한 번 악과 고통의 존재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착각에 현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