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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Oct 28. 2021

우리 분명 병들지 않았었나 나쁜 짓도 많이 하지 않았나

[박하사탕(2000)] Directed by 이창동

 영화는 철로 아래 모인 사람들이 벌이는 춤판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곧 의문의 사내가 난입해 추태를 부린다. 그 사내는 가리봉 봉우회의 잊혀진 오랜 친구, 김영호(설경구)다. 사람들은 김영호를 반가워하지만 김영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굴다 이내 철로 위로 올라간다. 그는 내려오라는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팔을 벌리며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장면 속 시간적 배경은 1999년이고 [박하사탕]의 개봉일자는 2000년 1월 1일이다. 가리봉 봉우회의 야유회는 이른바 '뉴 밀레니엄'에 대한 세기말의 기대감과 닮아있다. 반면 춤판에 난입한 김영호는 들떠있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묵직한 의문이다. 영화는 김영호를 통해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 이렇게 마냥 신나도 좋은 걸까. 우리 분명 병들지 않았었나. 나쁜 짓도 많이 하지 않았나. 현대의 사람들은 외면으로 답을 한다. 혼란스러운 김영호에게 마이크를 쥐어주고 춤을 추라며 음악을 틀뿐이다. 결국 견디지 못한 김영호는 잘못들을 만회하길 소망하며 철로에 선다. 그리고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시간 순으로 영화를 늘어놓았을 때, 이 모든 이야기의 방아쇠가 되는 장면은 바로 군홧발에 짓밟히는 박하사탕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박하사탕은 첫사랑 윤순임(문소리)이 보내준 것이다. 80년 광주에서 김영호의 박하사탕은 짓밟힌다. 마찬가지로 박하사탕처럼 흰 원피스를 입고 찾아온 윤순임과도 만나지 못하고 멀어져 간다. 김영호의 순수도 멀어져 가고, 그 자리에는 폭력이 들어온다.


 [박하사탕]은 김영호를 시대의 일방적인 피해자로 기술하지 않는다. 김영호는 일방적으로 파괴되지 않았다. 국가는 징병을 통해 김영호 내부에 폭력을 주입했고 김영호는 때가 되자 스스로 그 폭력을 선택한다. 김영호의 악행과 타락은 국가와 개인이 공범한 결과다. 계엄을 선포한 건 국가였으나 시민들에게 발포한 건 김영호라는 개인이었다. 데모를 진압하라고 명령한 건 국가였으나 대학생들을 고문한 건 김영호라는 개인의 두 손이었다. 착해 보이지만 오물을 뒤집어쓴, 김영호의 두 손으로 모든 일이 일어났다. 김영호라는 인물의 발진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히스 레저)'가 언급한 광기와 닮아있다. "광기란 너도 알다시피 중력과도 같아, 살짝 밀어주기만 하면 되거든. (As you know, madness is like gravity. all it takes is a little push.)" 그렇게 피해자 김영호는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그는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듣고도 물고문에만 전념한다. 그리고 실컷 고문해 자백을 받아낸 대학생에게 '삶이 아름답냐'라고 묻는다. 그의 질문은 마치 무엇이 우리의 삶을 이렇게 다르게 만들어놓았느냐고 따지는 듯하다. 똑같이 국가와 시대의 광풍을 맞고도 한 청년은 삶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다른 청년은 그 청년을 고문한다. 이 차이는 99년에는 훨씬 더 벌어진 모습으로 조우한다. 대학생은 가장이 되어 화목한 외식을 하는 반면, 김영호는 가정의 파탄을 확인하고 불륜 상대와 식사를 한다. 마찬가지로 김영호의 선택의 문제였다. 누군가는 폭력에 맞서길 선택한 반면, 김영호는 폭력을 받아들였다.


 김영호를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다름 아닌 '개'다. 그는 무작정 아내를 찾아와 반려견 '뽀삐'가 보고 싶었다고 중언부언한다. 이어지는 바로 다음 챕터에는 반려견을 무참히 걷어차는 그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나는 개 싫어. 개니까.' 이후 챕터가 넘어감에 따라 고문 경찰 김영호가 등장한다. 잡혀온 대학생에게 김영호의 별명이 뭔지 아느냐고 묻자, 김영호는 개처럼 으르렁 거린다. 아마 '개'와 관련된 별명이었을 테다. 이를 통해 앞서 그가 반려견을 걷어차며 뱉은 말에는 괄호가 붙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는 개 싫어. (내가) 개니까." 마찬가지로 87년의 김영호는 목욕탕에서 이발을 하고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손가락으로 욕설을 날린다. 마치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는 증오를 세상에게 돌리지 않고 거울 속 자신에게 돌린다. 개가 싫다며 반려견을 발로 차는 행위 역시 스스로를 향한 폭력이다. 이 모든 파탄이 온전히 세상 탓만은 아니며 본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이 싫은 만큼 스스로를 미워한다. 피해자 김영호가 안타까우면서도 가해자 김영호를 증오한다. 때문에 그는 '죽기 전 내 인생을 망친 놈 한 명은 죽이고 가겠다' 다짐하지만 콕 집어 한 명을 고르지도 못하며 골랐더라도 정확히 총을 쏘지 못한다. 결국 그는 혐의가 가장 확실한 용의자, '자신'만을 죽일 뿐이다.  


  영화는 시간의 예술이다. 1시간이 됐던, 100년이 됐던 첫 장면보다 앞선 미래에서 엔딩 크레딧을 맞는 게 통상적인 영화의 시간이다. [박하사탕]은 두 개의 시간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영화 내부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선형적인 시간이다. 다른 하나는 감독의 의도에 따라 재배열한 비선형의 시간이다. 인물들은 20대에서 40대로 나이 들었을 테지만 관객은 그 역방향의 시간을 감상한다. 두 개의 시간축은 두 개의 결말을 야기한다. 영화 속 인물이 체험한 시간대로 파괴된 김영호를 끝이라고 볼 수도 있고, 감독과 관객의 시간대로 순수의 김영호를 영화의 결말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후자에 동감한다. 특히나 철로 아래 누워 눈물 흘리는 김영호의 옆에는 들꽃이 피어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꽃은 마치 장례식이나 무덤가에 놓인 조화(弔花)처럼 보인다. 감독은 인물의 파괴로 영화를 맺기보다 파괴된 인물에 대한 조의로 영화를 맺기 원했다고 받아들여진다.  


 윤순임은 김영호에게 '그 꿈이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한다. 이 모든 일이 차라리 꿈이었더라면. 이 바람은 역사에선 불가능하나 영화는 가능케 한다. 영화는 김영호가 어떠한 선택도 하지 않았던 79년으로 돌아가 끝을 맺는다. 우리가 2시간 여 동안 목도한 치부와 환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박하사탕]은 우리 부디 앞으로 올 세상에선 좀 더 잘해보자는, 한 편의 눈물겨운 연하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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