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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Sep 28. 2020

[체리 향기] (The taste of Cherry)

directed by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1997

뜨거운 물을 살이 다 부르틀 때까지 가만히 서서 맞던 저녁에
혀끝을 물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

- 남극, 쏜애플(Thornapple) -


 

 남자가 차를 타고 달리는 이유는 자신의 죽음을 도와줄 조력자를 찾기 위해서다. 그는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자신의 차에 태워 자신의 자살을 도와주면 대가로 거액의 돈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한다. 자살을 도와준다는 것이 꽤 끔찍한 일 같겠지만 실상은 죽은 자신에게 흙을 덮어달라는 것뿐이다. 차례로 군인과 신학생을 만나 도움을 요청하지만 군인은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해 도망친다. 신학생은 남자에게 설교하려 하지만 뾰족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차에서 내리고 만다.

 

 오래간만에 참 지겨운 영화를 보았다. 영화는 운전하는 남자와 흙구덩이를 달리는 그의 자동차만을 일관된 앵글로  담아낸다. 영화 속 이란 근교의 풍경은 황량하다는 말도 부족했다. 그 매캐한 풍경을 보며 죽음을 구하는 남자와 함께 드라이브를 하는 건 참 고역이다. 아마 남자의 삶도 고역이었을 테다. 그가 죽음을 원하는 이유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다만 이 같은 일련의 이미지를 보며 그의 고역을 맛보기 할 뿐이다. 황량의 가운데를 뚫고 또 뚫어야 하는 순간이 바로 그의 삶에 지속적으로 가해진 밀물이었다. [체리 향기]는 영화적 기교 전혀 없이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고단한 남자와 동승하여 함께 황야를 가로지르고 죽음을 생각하는 90분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으로 가득했다.


 남자는 삶을 멈추려 하지만 차는 쉬지 않고 앞으로 간다. 조수석에 태운 사람들과 승강이를 하는 그 순간에도 차는 전진한다. 영화는 감독의 전작 제목처럼 '삶은 계속된다'는 걸 은근하게 영화 전반에 깔아놓는다. 전진하는 차와 더불어 가는 곳마다 등장하는 일하는 사람들과 공사장의 작업차량들은 황야가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생명력이다. 그중에서도 흙이 쏟아지는 공사현장은 생명력의 압권이다. 공사장의 흙들이 인부들에 의해 다뤄지는 이유는 오직 하나, 흙 그 이상이 되는 것이다. 벽돌이 되고 길이 되기 위해 흙은 파헤쳐지고 트럭에 실려 어딘가로 떠난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 잠잠하고자 했던 남자에 눈에 움직이는 흙, 치열하게 다음 상태로 분화하는 흙은 어떻게 보였을까. 그가 먼지를 다 뒤집어쓰면서도 공사현장에 주저앉아 기계에 돌아가는 흙을 내려다보는 그 대비는 같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같은 한 줌의 흙으로서 참 고무적이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체리'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사실 영화에 실제 체리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 동승자인 박제 기술자 노인이 자신이 경험한 체리에 대해 들려줄 뿐이다. 노인은 자신이 자살기도에서 살아 돌아온 이유가 체리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죽음의 순간 노인은 체리를 만났고, 등교하는 아이들을 만났다. 우리는 삶의 평범성을 상실할 때 비탄에 빠진다. 아주 평범하기 때문에 상실은 큰 고통이 되지만 너무 평범해서 회복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우리가 삶에게 고통받고 배신당하며 괴로워하는 그 모든 순간에도 체리는 같은 맛으로 같은 자리에 존재한다. 사람들은 체리가 없어서 죽는 게 아니다. 체리를 잊어서 죽는다. 영화 [체리 향기]는 체리를 가르쳐주는 강의로서 작용하지 않는다. 체리를 떠올리게 하는 일종의 산파술이다. 우리는 모두 체리가 필요하며 동시에 체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삶의 가능성을 전하는 영화, 체리 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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