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탄적일천(1983) directed by 에드워드 양
어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세계를 만들고, 어떤 감독은 세계를 통해 영화를 만든다. 에드워드 양은 후자의 방법을 탁월하게 수행했던 20세기의 거장이다. 그의 시네마에는 실존하는 일상 세계와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범인(凡人)들의 모습을 보며 '평범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한다. 평범히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유별한 사람들이 평범해지려 애쓰는 어려움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으며 때론 버겁기까지 한 어려움이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역시 ‘린자리’가 해변을 떠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프랑수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속 마지막 장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해탄적일천'은 그 장면으로부터 한 발짝 더 나아간다. '400번의 구타'에서 ‘앙투완’은 달아나 당도한 바다를 보고 한계와 부딪힌 당혹감을 느낀다. 린자리 역시 가부장의 권위로부터 달아났지만 행복은 없었고, 남편이 빠져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바다를 맞닥뜨린다. 그러나 린자리는 여기서 한번 더 움직인다. 아버지의 시대에서 떠나온 그녀는 바다를 벗어나는 것으로 남편의 시대를 벗어나 자기 자신의 시대로 향한다. 이 시점에서 자리와 대립항을 이루는 인물인 아버지, 오빠, 그리고 남편은 모두 죽음을 맞거나 실종되는 것으로 텍스트 밖으로 사라진 이후다.
'해탄적일천'에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들 뿐이다. 성장기의 자리가 느끼는 갈등은 같은 시대를 살며 전통적 가치관과 자유화의 바람 사이에 혼란을 느끼던 386 세대의 비애와 닮아있다. 영화는 세월을 넘어와 오늘날 2030의 청년들의 모습까지 대변한다. 어른들과 미디어가 주입했던 막연한 삶의 환상이 깨져버린 느낌, 세상 물정 모른 채 어른이 되는 공포, 심지어는 내 집 마련의 어려움까지도 영화는 이야기한다. 영화가 개봉한 지 4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어른이 되는 일은 어렵다. 영화는 따분한 설교로 그 아픔을 덮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과감함을 말한다. '해탄적일천'은 전부 같던 세상을 뒤로하고 시대를 벗어나는 멋진 친구이자 선배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거장의 어렸던 시절과 당돌한 메시지를 보며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또 한 번 삶에 대한 기대를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