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분자 (1986) directed by 에드워드 양
그의 유작인 '하나 그리고 둘'이 지닌 따듯한 톤 때문인지, 생전 뿔테 안경을 낀 선한 인상 때문인지 간혹 에드워드 양을 가족 영화의 대가처럼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의 영화 세계는 줄곧 차갑고 맵싸한 톤을 유지했다. 그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느끼는 소외, 시대의 풍파가 주는 좌절을 변주해온 감독이다. '타이페이 스토리'는 어디에도 없는 자기 자리를 찾아다니는 도시인들의 고충을 다룬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폭력의 시대에 노출된 소년들을 날 것의 느낌으로 전한다. 심지어 '하나 그리고 둘'마저도 감독 특유의 서늘함이 조금 덜하다 뿐이지 없지 않다.
'공포분자'는 에드워드 양의 커리어에서 가장 난해한 영화다. 줄거리를 요약하기도 쉽지 않으며 영화의 출발과 도착이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서로 연관 없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뒤섞여 합을 이루는 '펄프 픽션'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포분자'의 경우 연관 없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만나기는 하지만 '펄프픽션'에 비하면 그 인력(引力)이 턱없이 부족하다. 등장인물 전원이 서로 남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런 난해한 구조는 도시의 생태계를 드러낸다. 각자의 욕망을 갖고 살아가는 불안한 인물들. 함께 부딪히고 영향을 미치며 살지만 서로의 정체, 그 영향의 기원을 도무지 알 수 없다.
다리 위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관찰하는 장면 다음에는 청년의 팔에 매달린 카메라가 대롱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의도를 갖고 특정한 인물을 찍는 듯했지만 사실은 무작위로 셔터가 눌린 것뿐이었다. 아인슈타인의 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의 역을 보는 듯하다. 어떤 방향성도, 선하거나 악한 의도도 없이 무작위로 던져진 도시인들의 삶은 마치 신의 주사위 놀이 같다. 이런 무작위성은 인물들의 욕망이 이루어지는 방법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아내는 삶의 권태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글을 쓰고 아이를 가지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바람은 원하던 때가 아닌 엉뚱한 때에 이뤄진다. 남편의 삶이 박살 나서야 아내의 글은 당선되고 입덧을 한다.
이런 에드워드 양의 주사위 놀이는 심지어 허구와 사실을 오간다. 사실을 상징하는 사진가 남자와 허구를 상징하는 소설가 여자 가운데 선 남자는 이름마저도 '립중(立中)'이다. ‘이립중(이립군)’이라는 인물은 마치 '고령가 소년 살인 사건' 속 주인공 소년 '샤오쓰(장첸)'이 어른이 된 모습을 보는 듯하다. 샤오쓰와 이립중은 모두 신의 주사위 놀이에 좌절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공통의 방법, 폭력을 통해 말판에서 벗어난다. 소년의 폭력은 외부로 발산된 반면, 중년의 폭력은 내부로 수렴하는 자기 파괴다. 에드워드 양의 도시에서 폭력은 다른 감독들의 도시 속 폭력과는 결이 다르다. 여타 감독들의 폭력은 세상을 바라보는 모니터처럼 기능한다. 반면 에드워드 양의 폭력은 감상하는 일은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평범한 사람들, 나 같은 사람들의 자기 파괴는 애잔함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