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벤느망 Directed by 오드리 디완 (2021)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안(아나 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지만 의사들은 임신 중절이 범죄이기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고 한다. 기숙사에 사는 '안'의 주변엔 그녀의 행실을 헐뜯을 생각뿐인 학우들과 세상 물정 모르는 친구들 뿐이다. '안'이 출산을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강구하는 사이 학업은 소홀해지고 인간관계는 점점 소원해진다. 그러나 노력에도 불구하고 임신 주차는 점점 흘러가고, '안'은 최악의 방법이라도 감내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는 화면의 안팎으로 영화가 집중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한다. 화면 안에서는 ‘안’ 이외의 모든 인물들을 생략한다. 어떤 인물도 ‘안’ 없이 단독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주변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나 맥락도 ‘안’과 무관하다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안’에 대한 집중은 화면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영화는 독특하게도 1.37:1을 화면비로 사용한다. 이는 인물 한 사람을 담는데 최적화된 4:3 화면비와 유사하며 실제로 우리 눈은 1:1에 가깝게 인식하는 비율이다. 영화는 화면비를 통해 오직 한 번에 한 가지 정보, ‘안’에 대해서만 담기로 약속한다. 이런 좁은 화면비에 인물을 꽉 채우는 촬영은 '안'이 처한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의 문제처럼 인물을 조여 온다. 특히 영화 속에는 '안'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채운채 뒤따라가며 시작하는 쇼트들이 자주 등장한다. 인물을 옥죄는 화면과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그러나 맥없는 Z축의 움직임은 이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와 심상을 한눈에 보여준다.
영화는 ‘안’이 사는 세계를 기숙사로 은유한다. 기숙사는 통제와 상호 감시로 이루어진 사회다. 이 세계에서는 모두가 같은 욕망을 공유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안'과 친구들이 함께 옷핀으로 속옷을 고정하며 들떠하는 모습이다. '안'이 유별나거나 문제 있는 인간이라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게 결코 아니라는 설명이다. 우리 모두는 이성에게 돋보이기 원하는 천진한 청춘일 뿐이다. 그게 죄가 될 순 없다. 그러나 이런 욕망을 발현하는 즉시 공동체원으로부터 비난과 제재를 받는다. '안'의 세계가 성을 금기시한 결과, 성과 성에 대한 문제들은 점점 더 음지로 들어간다. 또한 개인과 사회는 성을 욕망의 문제로만 치부한다. ‘안’의 친구들이 성경험에 대한 환상을 나눌 때, 그들을 응시하는 ‘안’의 표정은 몹시 무겁고 불안하다. 성이 오로지 전희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통감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후에 친구들의 성적 환상에 대고 ‘그리고 임신하겠지’라고 말하자 친구들은 기겁한다. 인물들은 성과 생명을 아예 별개로 취급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생명의 무게로 꽉 차있던 영화는 끝내 그 무거움을 두 눈으로 확인까지 시켜주고야 만다. 반면 이 사회는 이런 통제와 감시에 비해 안전장치는 턱 없이 부족하다. 기준에서 벗어난 학생은 버려지고 세상은 낙제생들 무시한 채 계속 앞으로 전진한다. 결국 ‘안’은 보편적인 욕망을 실현했다는 이유로 누구의 책임도 아닌 존재가 된다.
그러나 영화의 초점은 '안'이 속한 사회가 아닌 '안' 그 자체에 맞춰져 있다. 영화는 사회 제도의 변혁 같은 거대 담론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철저하게 한 인물과 그녀에게 일어난 사건을 따라간다. ‘레벤느망’은 다르덴 형제 감독의 대표작 ‘로제타’처럼 ‘안’이라는 인물을 집요하게 쫓아가는 사실주의를 표방한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나 르포를 보는 듯하다. 영화는 여성주의, 임신중절과 같은 뜨거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무섭도록 차갑다. 어떠한 이념적 환상이나 호소, 가치판단도 없이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데만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책임감, 죄책감, 무게감, 공포감은 오로지 관객에게 속한 것이다.
임신 확인서를 찢은 직후, 친구들은 잔디밭에서 ‘Agires(행동하다)’라는 단어의 격변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안’과 친구들은 ‘행동하다’라는 동사를 주문처럼 되뇐다. 이 장면은 ‘안’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스스로에게 행동하길 촉구하는 자기 암시의 순간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어 화자에게 이 장면은 ‘아기’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만약 ‘안’이 외우는 단어가 ‘아기’라면 이 장면은 본인이 처한 상황을 뼈아프게 자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렇게 제작 과정에서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방법으로 스스로의 층위를 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