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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Apr 05. 2022

낯선 세계사에게 들켜버린 지극히 사적인 순간들

벨파스트 Directed by 케네스 브래너


 '벨파스트'의 미장센은 시간을 거스른 듯하다. 단지 흑백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속 카메라는 고정되어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인물의 동선은 최소한만 존재한다. 영화는 화면 안에 공간을 분할하고 인물을 배치시키거나 클로즈업으로 인물들의 얼굴을 크게 찍는다. 기억 속 사건의 역동성보다는 사건의 얼굴을 조명한다. 이런 식의 촬영 양식은 '벨파스트'가 감독의 사적인 회상이라는 사실을 강화하고 관객들이 수긍할 수 있게 돕는다. 또한 '벨파스트'는 기억의 회상인 동시에 기억 속 영화의 회상이기도 하다. 때문에 감독은 고전적인 양식을 활용해 영화 속 이야기의 시간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의 시간을 과거로 돌린다.  


 벨파스트의 '버디'의 집 대문에는 '96'이라는 숫자가 붙어있다. 아마 버디네 집 주소가 '96호', 또는 '96번지'이기 때문일 것이다. 9와 6은 서로 닮은꼴인 동시에 서로 반대 방향을 바라본다. 이 숫자는 벨파스트에서 이뤄지고 있는 갈등을 기호로 보여준다. 개신교와 가톨릭, 왕당파와 공화파 모두 결국 9와 6처럼 서로 닮은 모습으로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이웃이기 때문이다. 숫자 '96'이 걸려있는 버디의 집은 이분법이 사라진 낙원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엄마와 아빠는 서로 의견이 다르고 갈등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공존한다. 특히 이분법을 허무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을 버디의 할아버지다. 버디의 할아버지는 버디에게 시험 답안을 적을 때 숫자를 애매하게 적으라고 가르친다. 정답이 하나라는 강박이 세상을 둘로 나눴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 그가 보이는 공동체 구성원을 향한 사랑은 버디의 성장 중인 사고에 유연성을 부여한다.


 할아버지의 죽음 또한 이분법을 허무는 중요한 과정이다. 할아버지의 장례 다음에는 가족들의 파티 장면이 이어진다. 이 장면이 우리에게 어리둥절한 이유는 죽음은 부정, 파티는 긍정이라는 고정관념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례식에서 목사는 '죽음에 슬퍼하기보단 그가 우리와 함께 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라고 설교한다. 이렇듯 '벨파스트'는 영화 전체에서 가장 슬픈 장면과 가장 기쁜 장면을 연달아 배치해 '죽음은 나쁘고 삶은 좋다'는 이분법을 해체한다.


 우리는 '벨파스트'를 감상하는 동안 단 한 편의 영화만을 감상할 수 없다. 영화 내적으로 인용된 영화들, 영화가 연상시키는 영화들, 그리고 관객의 사적인 경험이 모두 동시 상영된다. '벨파스트'는 소년의 눈으로 바라본 시대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조조 래빗', '인생은 아름다워',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닮아있다. 이민자 서사라는 점은 '미나리'와 유사하고 다루는 역사적 사건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이외에도 개인의 영화 감상 경험에 따라 떠올릴 수 있는 영화는 무한히 많다. 게다가 버디의 주변을 이루는 일상적 세계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우리는 모두 고향을 떠나야 하는 소년이었던 적이 있다. 영화는 만남, 이별, 갈등, 화해 같은 통속적인 주제들을 촌스럽지 않게 배합한다. 지극히 사적이고 탁월한 각본 앞에 우리의 마음은 무방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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