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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May 05. 2022

삶을 삶으로, 영화를 영화로 만드는 매력적인 재료들

우연과 상상 (2021) directed by 하마구치 류스케

 우연이 가득한 각본은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질문을 향해 좋은 영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되묻는다. 우연으로 가득한 우리 삶, 참 우습고 멋지지 않냐고. 『우연과 상상』이라는 제목은 직접적이다. 마치 재료 이름으로 지은 음식 이름처럼 미리 그 맛을 유추하도록 기능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제목에 드러나지 않는 재료로 그 맛을 완성한다. 그 재료는 바로 '비밀'이다. 인물들은 모두 비밀을 품고 있다. 1부의 '메이코'는 절친에게 찾아온 새로운 인연이 자신의 옛 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부의 '나오'는 남편이 있지만 끊지 못하는 외도 관계가 여럿 있다고 고백한다. 3부에서 '아야'의 비밀은 남편의 이메일을 읽고 그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나츠코'의 비밀은 고교시절 사귀었던 여학생을 여전히 그리워하는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다. 이렇듯 비밀은 영화 속 인물들의 삶을 작동시키는 엔진이다. 비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과 이야기는 전진한다.


 그 비밀을 세상 밖으로 터트리는 역할은 '우연'이 맡고 있다. 영화에는 예상치 못한 만남과 실수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런 우연들은 이야기를 순식간에 높은 곳으로 끌고 올라갔다가 툭하고 떨어트린다. 1부의 삼자대면, 2부의 이메일 오타, 3부의 두 인물의 만남에서부터 이야기는 아찔해진다. 우리는 이 손쓸 수 없는 자유낙하를 바라만 본다. 속수무책인 인물들은 그 대안으로 상상을 한다. 누군가는 이뤄지지 않을 최선을(3부의 나츠코와 아야), 누군가는 일어날지도 모를 최악을(1부의 메이코) 상상하며 본인들의 추락을 이겨낸다. 이때 사용하는 급격한 줌인은 현실과 상상을 분리한다. 관객은 눈앞의 장면들이 상상인 걸 알면서도 그 시간을 인물들과 함께한다. 다음 장면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보는 관객은 다음 순간을 상상하는 인물을 보며 본인과 인물이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관객과 인물 사이 동질감 형성은 영화와 삶의 경계를 허무는 하마구치 류스케 특유의 비법이다. 이렇게 비밀에 우연이 만나 발생한 하강은 상상을 거쳐 마침내 비행으로 바뀐다. 세 이야기 모두 인물들은 날아가듯 이야기를 떠나간다. 마치 이 영화의 4부가 곧 시작할 것처럼 객석을 떠나는 관객의 발걸음도 산뜻하긴 마찬가지일 테다.  


 우연이라는 작은 오차에도 바스러질 만큼 연약한 삶, 그 위기의 순간에도 할 수 있는 건 상상 밖에 없는 우리. 이 우습도록 작은 것들이 글로 쓰자 이야기가 되었고 필름에 담자 영화가 되었다. 나는 『우연과 상상』이 우리 시대의 『하나 그리고 둘(2000)』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비밀을 간직한 보통의 삶이 갖는 미(美)에 대해 다룬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하나 그리고 둘』이 우리 삶을 유려한 풍경화처럼 그려냈다면, 『우연과 상상』은 경쾌한 소조 같다. 그때그때 되는대로 잘라 붙이는 것 같아도 매 순간 매끄럽고 정교하다. 각본에 강점을 지닌 감독인 만큼 말은 힘이 있고 인물은 살아있다. 지난 2년간  『스파이의 아내』와 『드라이브 마이카』를 통해 절정의 기량을 보여줬던 하마구치 류스케의 '마법'이 '다시 한번' 우리에게 찾아왔다. 작고 사소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단, 삶과 영화가 서로 왕래하도록 '문은 열어둔 채로' 감상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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