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트스거오 다이어리 directed by 미겔 고미쉬
22일, 세 명의 남녀는 술을 마시며 춤을 춘다. 그러던 중 두 남녀가 키스하고, 다른 한 남자는 이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본다. 21일, 세 남녀는 봉고차에 누워있다. 남자는 파티를 열자는 다른 남자의 제안에도 권태롭고 비관적으로 대답한다. 20일, 19일, 시간은 거듭 거꾸로 간다. 역순 구성은 영화와 관객의 문답을 뒤집어 놓는다. 영화가 먼저 대답하고 관객이 나중에 질문을 하는 셈이다. 영화가 날짜를 보여주면 관객은 그 날짜를 궁금해한다. ‘몇 월 며칠’ 할 때 ‘며칠’에 해당하는 날짜인지, 아니면 무엇으로부터 며칠째 되는 날이라는 뜻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가 세 남녀를 보여주면 관객은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 질문한다. 영화와 관객이 문답을 주고받는 사이 마침내 13일, 영화는 관객에게 사실을 밝힌다. 현재 이들은 팬데믹으로 인해 한 집에 고립된 채로 영화를 찍고 있다. 관객은 앞서 언뜻 등장했던 마스크 쓴 남자가 힌트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세 남녀는 영화의 주연배우들이다. 배우들은 이 영화의 스태프, 직접 등장한 감독 ‘미겔 고미쉬’와 함께 이 영화의 앞날을 고심하며 회의한다. 그러나 이 큰 대답에는 큰 질문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앞서 우리가 본 열흘의 시간은 모두 픽션인가? 이 영 화는 다큐멘터리인가? 어디까지가 영화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의 전개는 영화 속에서 세 남녀가 열심히 짓는 나비 집과 같다. 영화는 나비 집을 짓는 과정을 시간 역순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영화가 진행할수록 나비 집은 완성에서 멀어지고 오히려 해체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 역시 첫 시작인 22일에는 배우와 연출된 상황만 등장하는 반면, 영화의 후반부에는 배우는 없고 영화를 만드는 제작진의 모습만 등장한다. 영화는 완제품에서 시작해 재료와 공구만 남은 채 끝이 난다. 이 같은 영화의 해체는 관객의 의식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 존재하게 하는 효과를 야기한다. 현재 보고 있는 장면은 눈앞에서 펼쳐진다는 점에서 현재이지만, 앞서 본 시퀀스가 미래이기 때문에 이 장면 은 과거가 된다. 한마디로 한 시퀀스를 볼 때마다 관객은 현재라는 시간 속에 미래를 아는 상태에서 과거를 보고 있다. 영화의 요소들을 분해하는 바람에 각자 위치에 있어야 할 시간이 한 곳에 모여 뒤섞여버린 셈이다. 이는 마치 정면과 측면을 한 장면 안에 그려 시간을 함축 시킨 피카소의 입체파 작품과 닮아있다. 피카소는 인물의 얼굴을 그릴 때 앞모습, 옆모습, 뒷모습까지 모두 한 폭에 그리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은 대상을 바라볼 때 세 면을 동시에 볼 수 없다. 서로 다른 면을 관찰하고 그리는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발생한다. 따라서 한 장의 피카소 그림 안에는 여러 개의 시간대가 공존한다.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 매체 특유의 동시성을 발휘한다. 영화는 13일 차부터 제작진과 제작 과정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오며 이 모든 것이 영화임을 밝힌다. 그 때문에 관객은 앞서 봤던 장면,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될 모든 장면을 허구, 실제, 또는 실제의 재구성이라는 인식이 모두 뒤섞인 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배우가 배우를 분하고 제작진은 제작진을 분한다. 모든 시퀀스는 계산과 약속에 따라 촬영한 연출이면서도 온전히 현실을 반영한다. ‘소설가의 영화’ 속 ‘준희(이 혜영)’의 대사처럼 ‘사실을 찍지만, 다큐멘터리는 아닌’ 기묘한 모순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이는 실제를 기반으로 허구를 다루는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입체주의다.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의 주연은 인물이 아닌 ‘영화’다. 영화 속에서 ‘영화’는 팬데믹이라는 한계를 직면하고 극복하는 수행적 존재다. 또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실의 문제를 영화의 소재로 삼으며 동시에 허구와 실제의 이음새를 지우는 방식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몇몇 영화들을 닮았다. 그러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현실의 문제를 묵직한 힘으로 부수며 나간다는 인상을 주는 반면,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는 장난스럽고 미끄럽게 현실의 문제를 빠져나간다.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은 영화 속 ‘1일 차’다. 방역 당국의 담당자가 등장해 제작진 앞에서 영화 촬영 기간 지켜야 할 방역 수칙을 설명할 때, 그의 말은 점점 작아져 들리지 않게 된다. 그리고 한 스텝이 앞으로 나와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다른 스텝과 언쟁을 벌인다. 영화는 팬데믹, 셧다운 같은 외부의 제한을 무시하고 비웃는다. 영화는 그 방법으로 파티를 선택한다. 영화 속에는 ‘파티를 열자’는 제안과 ‘아무도 안 올 것’ 이라는 거절의 대화가 세 번이나 반복 등장한다. 이런 대사가 무색하게도 영화는 파티 장면으로 수미상관을 이룬다. 영화를 만드는 모두에게 팬데믹은 아무도 영화를 보러 오지 않는 밤이 었을 테다. 따라서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가 벌이는 파티는 영화를 만드는 일, 또는 그들의 영화가 최악의 시기에도 굴하지 않았음에 대한 자화자찬처럼 보인다. 미겔 고미쉬는 말한다. 밤이 길다면 춤을 추자. 그게 바로 암흑기를 지나는 예술가들의 방식이며 예술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