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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Mar 20. 2021

[중경삼림] (Chungking Express)

directed by 왕가위, 1994


 이동진은 웨스 앤더슨 감독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대하여 이렇게 한 줄을 적었다. ‘지나온 적 없는 어제의 세계들에 대한 근원적 노스탤지어.’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한 줄을 훔치고 싶다. 훔친 문장을 들고 몰래 ‘중경삼림’의 문을 따고 들어가고 싶다. 잠입에 성공한다면 나는 그 문장을 슬쩍 탁자 위에 올려두고 나올 테다. 내 마음에 이 문장은 ‘중경삼림’에게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홍콩에 사는 경찰 ‘223(금성무)’과 ‘663(양조위)’은 여자 친구에게 조금은 터무니없는 이유로 실연을 통보받는다. 그들이 실연을 이겨내는 방법은 우스우면서도 처연하다. 223은 여자 친구의 연락을 기다리며 사 모은 파인애플 통조림은 몽땅 먹어치우고, 그가 아는 모든 여자들에게 전화를 건다. 663은 속옷 차림으로 방 안에 사물들에게 말을 걸며 남일 대하듯 스스로를 타이르고 다독인다. 하지만 진짜 실연으로부터 그들을 구하는 건 새로운 인연이다. 223에게는 금발의 마약상(임청하)이, 663에게는 단골 식당의 새로운 직원인 ‘페이(왕페이)’가 나타난다. 그녀들의 등장은 실연의 순간에 정체해버린 두 남자의 감정과 이야기를 다음 페이지로 끌고 간다.


 ‘중경삼림’은 Side-A와 Side-B로 구분된 한 장의 LP, 혹은 카세트테이프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각 면에 수록된 악곡은 서로의 변주곡이다. 두 편의 이야기는 홍콩, 경찰, 실연이라는 큰 제재에서부터 선글라스, 통조림 같은 자잘한 소품에 이르기까지 서로를 공유, 또는 오마주 한다. 영화는 간소한 내러티브에 감각적 순간들의 분출을 덧입혀 러닝 타임을 헤쳐나간다. 인물들의 움직임이 흥청거리듯 번져보이는 첫 시퀀스의 등장에서부터 우리의 감각기관은 매료된다. 연달아 등장하는 이국적인 홍콩의 밤거리와 이색적인 마약상의 차림, 감상적이고 아이코닉한 대사와 음악은 그저 한 컷 한 컷 우리를 취하게 할 뿐이다.


 경찰 223의 이야기는 '끝'을 두려워하는 원초적인 마음에서 나오는 반작용의 과정이다. 오직 관계의 끝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로부터 수십 년 이후의 수용자인 우리에겐 이 '끝'이란 한 때의 젊은 날의 끝, 혹은 한 때의 홍콩의 끝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223에게도, 관객에게도 눈 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던 사랑스런 순간들이 이제는 의지적으로 끄집어내어야만 하는 잔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223은 그 잔상을 박제하고픈 마음에 통조림에 대해서 대사와 독백으로 뇌까린다. 223의 염원은 적어도 관객에겐 영구적인 잔상으로 남았다. 원어민이 아닌 한국의 관객에게 223과 마약상의 이야기는 장면과 자막의 층위가 서로 달라붙어 명백한 잔상으로 우리의 뇌리에 박힌다.


 Side-A가 잔상을 남긴다면, Side-B에 해당하는 663과 페이의 이야기는 잔향(殘響)을 남긴다. 663과 페이의 관계 속에서 대화는 거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Side-A에서 서사를 이끌던 혼잣말 같은 내레이션도 Side-B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만 등장한다. 오직 음악, 시끄러운 음악이 대화를 대신한다. 둘 사이에는 이 영화의 상징과도 같은 ‘California Dreaming’이 꽉 찬 볼륨으로 흐른다. 663의 주변을 맴돌던 페이는 663의 전 연인을 통해 그의 집 열쇠를 얻는다. 페이는 663의 집에 몰래 들어가 전 연인의 흔적들을 자신의 자국으로 바꾼다. 663의 집과 마음은 페이에 의해 정리되고 동시에 어질러지며 BGM마저 바뀐다. 페이의 노력 끝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663과 관객은 같은 잔향을 공유한다. 사건들이 소강되고 영화의 마지막 순간 서로 맞바꾼듯한 복장과 위치에서 재회한 두 남녀 사이에 흐르는 음악도 역시 같다. 90년대 홍콩의 여름밤은 그곳보다 훨씬 더 먼 미지의 세계를 찬미하며 이륙한다. 여전히 귓가에는 'Californial Dreaming’이 맴맴 돈다.


 어느덧 ‘중경삼림’은 영화를 넘어 90년대 홍콩을 담은 한 편의 아카이브, 혹은 한 캔의 통조림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었다. 영화가 관객을 남겨두고 떠나는 순간 한 여름밤의 꿈은 다시 세상으로 내려온다. ‘참 좋은 꿈이었다’고 말하며 객석에서 일어나는 스스로의 모습이 아쉬운 건 왜일까. 많은 밀레니얼의 관객들이 그렇듯 나 역시 홍콩의 황금기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 때문인지 그 잔상과 잔향은 더욱 애틋하다. 비록 완벽하게 향유할 수 없겠지만, 아름다움을 만년이고 간직하고 싶은 마음은 시대를 지나도 변함없기 때문일까.


 잔상과 잔향으로 남은 어느 한 시절의 아카이브, 중경삼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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