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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리왕 Mar 28. 2021

[화양연화] (In the Mood for Love)

directed by 왕가위, 2000


 말문이 턱 막힌다. 영화가 끝나고도 온통 세상이 빨개서 어쩔 줄 몰랐다. 타인의 비밀을 알아버린 그 당혹감에 대한 반응인지.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고 사랑을 그려낸 그 경지에 대한 탄복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을 두고 왁자지껄 떠드는 것도 푼수 짓이다. 나는 말을 줄이고 글을 적는다.


 ‘화양연화’가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줄곧 은밀하다. 카메라는 창문 너머로, 거울을 통해, 또는 무언가의 틈새나 사이로 인물들을 바라본다. 사건의 발단인 차우와 첸의 배우자가 등장할 때는 대화만 들려주고 인물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감추고 가리고 숨기는 방식으로 미장센을 구성한다. 마치 두 인물이 자신의 마음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인물도 영화도 그들의 본심을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거리낌 없이 인물의 정면을 직시하는 샷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안한 순간이다. 아내의 외도를 눈치챈 차우, 남편의 외도 상대와 대면하는 첸. 비통함과 난처함의 얼굴은 한껏 클로즈업되어 화면을 가득 덮는다. 두 인물을 한 프레임에 담을 때도 대체로 오버 숄더 샷을 통해 둘 중 한 명은 등을 보여준다. ‘화양연화’ 속 이러한 인물 배치는 함께 있어도 혼자라는 느낌을 강하게 전달한다. 차우와 첸은 등으로 둘러싸인 섬이었던 셈이다. 고립감이 느껴지는 오버 숄더 샷은 차우와 첸이 점차 가까워지면서 빈도가 줄어든다.


 ‘화양연화’는 관계란 곧 ‘겸상’이라고 말한다. 함께 밥을 먹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혼자 있는 첸은 번번이 국수로 끼니를 때운다. 차우의 직장 동료는 ‘국수만 먹었더니 배고파 죽겠다’고 토로한다. 직장동료의 푸념을 통해 첸의 심적, 관계적 허기가 드러난다. 혼자 끼니를 때우는 건 차우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음식을 사러 가는 길에 서로 마주치고 옷깃을 스치다 이내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슬로 모션으로 표현된 이 시퀀스는 감각적인 음악과 촬영 덕에 매우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이 ‘아슬아슬함’은 각자 허기를 해결하는 두 인물에 대해 ‘어서 함께 밥을 먹었으면’이라는 일종의 애태움이다. 마치 두 남녀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장면을 볼 때 ‘어서 손을 잡았으면’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하다. 허기에 빠진 두 인물의 관계가 발단하는 장소는 바로 식당이다. 그들은 처음으로 우연히 마주치지 않고 시간을 잡아 만난다. 그들은 식당에 마주 앉아 암호 같은 말로 서로의 배우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관계의 전개 속 함께 스테이크를 썰고, 아픈 차우를 위해 죽을 챙기는 모습은 스킨십의 자리를 대체한다. 외로운 식탁에 찾아온 사람만큼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이도 없기 때문이다.


 찰나를 담아온 왕가위의 여러 편의 영화 중에 ‘화양연화’는 유독 앙상하다. 영화는 언젠가 무너질 사랑의 순간을 붙잡으려 장면과 시간을 길게 늘인다. 그러나 시간은 초침 없는 시계처럼 소리 없이 흐른다. 서로의 배우자를 상상하며 연기를 하던 중 첸은 '이렇게 속상할 줄 몰랐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차우는 '가상이지 실제가 아니'라며 첸을 다독인다. 첸이 눈물이 났던 건 그 순간이 가상이지 실제가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지나간 찰나는 찰나에 그친다. 간절한 바람은 바람으로 남아버린다. 이런 속절없음은 인물을 넘어 화면 밖 우리마저 지배한다. 영화는 앙코르와트의 등장으로 앙상함에 방점을 찍는다. 그곳은 찬란한 시절은 지나가고 터와 뼈만 남아 숲 속에 감추어진 유적이다. 비밀을 감추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곳이 있을까. 차우는 못다 한 고백을 하듯, 못다 한 입맞춤을 하듯 유적의 구멍에 토로한다. 부디 그 봉인의 유통기한이 만년이길. 한 명의 속절없는 인간으로서 그들의 찰나를 성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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