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고백
썸이라는 단어는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신조어가 생겨날 때마다 너무나 오묘해서 참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열심히 쓰게 된다. 사귀는 건지 아닌지를 명확히 해야 하는 나로서는 이 ‘썸’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좋았다.
썸 - 고백 - 연애 순서가 탁탁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애매했던 단계가 명확히 나뉘는 멋진 순간이다.
남자 4번과 사귈 때 뭔가 어물쩡하게 넘어가듯이 사귀는 것처럼 행동을 하길래 나는 사귀는 건지 아닌지를 확실히 해야 사귀는 거다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고지식하게 들리겠지만 난 그렇게 좋던지 사귀던지 하는 개념을 입 밖으로 확실히 내뱉어야 사귀든지 말든지 할 수가 있었다. 사귀게 되면 국면이 달라지기 때문에 애매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게 싫었다. 아마도 나는 ‘이런 행동을 하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에 대한 고민 자체가 싫은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세리머니가 필요했다. 그냥은 절대 시작할 수가 없다.
2023. 10. 24. 09:28, ISFP : 일어나삼~~
2023. 10. 24. 09:29, INFP : 일어났는데요 난 이동 중입니다
2023. 10. 24. 09:30, ISFP : 달리기요?
2023. 10. 24. 09:31, INFP : 얘기한 소개팅남만나러 가요
2023. 10. 24. 09:33, ISFP : ㅈ..자.ㄹ...다녀..와요. 밥만 먹고 오심이 어떨까요?ㅋ
2023. 10. 24. 09:35, INFP : 왜요? 나 소개팅남이랑 잘되도 어쩔수없다매여. 너무우껴여 ㅋㅋㅋㅋㅋ 아침부터 기분은 좋네요^^
2023. 10. 24. 09:50, ISFP : 기분 좋다니까 나도 좋아~ 다녀오시고 톡주세요~(안주면 궁금해 주금)
소개팅남을 만나러 홍성역에 도착했는데 홍성이 고향인 볼링클럽 멤버가 있어서 클럽 사진첩에 홍성역 사진을 올렸다. 그랬더니 그 사진을 보고 연락이 왔다.
2023. 10. 24. 15:18, ISFP : 소개팅하러 홍성역으로 가신겁니까??
2023. 10. 24. 15:35, INFP : 네에 그렇습니다만. 이쪽 사람을 소개받았습니다만 왜그러시죠
2023. 10. 24. 15:38, ISFP : 궁금하니까요ㅠㅠ 얼굴만 보고 빨리와요.
2023. 10. 24. 17:00, INFP : 왜죠 왜 내가 왜 그래야 되져
2023. 10. 24. 17:03, ISFP : 그래야해요~ 기다리고있겠습니다.
2023. 10. 24. 17:14, ISFP : 우선 조심히 다녀와요. 이따 전화할게 ~
한 시간 후
2023. 10. 24. 18:21, ISFP : 내가 좋아하니까!!! 계속 연락하는거야~~
2023. 10. 24. 22:17, INFP : 아아 그렇구나 몰랐어요 (직접 듣고싶네에)
입 밖으로 드디어 그 말이 나왔다!
이따 전화한다더니 안 되겠는지 한 시간이 지나고 한 저 말이 어찌나 듣기 좋던지!
그 고백이 기분 좋은 건 그거고 그것에 대한 내 반응이 있어야 했고 난 그러기 위해 오프라인으로 다시 한번 듣고 대답하는 고백타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날을 잡아 만나기로 했다. 거의 ‘고백하러 와’였다.
난 이제 다 됐다고 생각했다.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아서 고백이 남았지만 이건 이제 바로 사귀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백을 하고 사귀자고 하면 '좋아요'를 너무 빨리 말하지 않으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날이 다가왔다. 이런 약속을 잡아 본 게 언젠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연락은 착착 잘 되고 약속은 착착 잘 잡아서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당일 점심쯤에 S가 약속장소를 잡아 알려줬는데 장소도 우리 집 근처에 마침 내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을 잡았다. 어둑어둑한 이탈리안 식당이었는데 캐주얼하고 천변에 위치해서 분위기가 그만인 곳인데 혼자 갈 수 없는 곳이었어서 누구랑 가지 재고 있었던 곳이었다.
그것부터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난 옷을 갈아입고 나가면서 천천히 대답해야 해라고 되뇌었다.
마음속에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네!‘라고 대답할 기세였다. 내가 소개팅을 하러 갔을 때 그 안절부절못하던 모습과 S에게는 입 밖으로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을 꺼냈을 때의 그 수줍음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호감도가 급 상승했기 때문이다. 내가 S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억지로 내뱉음 당한 그 말로 인해 확실히 알게 됐다.
답답해하던 점도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나도 이 느려 터진 속도가 너무나 좋았다. 천천히 과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친해지는 건 전적으로 S의 공이 컸다. 생각해 보니 조종당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완벽하게 자만추가 실현됐다.
처음에 어떻게 만나서 들어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어색했다. 평소에는 어색하지 않았는데 역시 약속을 잡고 만난 이 '데이트'는 떨렸다.
꽃을 들고 왔고 평소와는 다르게 옷도 입고 왔다. 역시 너무 떨려서 좋았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식사를 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S가 알 수 없는 말을 구구절절했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고 어떤 일이 있었고 나를 어떻게 생각했으며 등등 좋아하니 사귀자는 말을 1시간 동안 돌려 말했다. 사귀자는 말도 정확히 그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나도 밀당 같은 건 하지 않는 타입이라 바로 대답할 줄 알았는데 긴 시간 대화가 끝나가도록 ‘좋아요’라고 말할 타이밍을 찾지 못했고 심지어 그 마음이 아예 사그라들었다.
‘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되죠?’라고 돌려 말했는데 S는 고백이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우리는 성북천을 1시간 정도 걸으며 더 얘기했다. 얘기할 때는 몰랐는데 집에 오니 기분이 그리 신나지 않았다.
아직 고백에 대한 답을 한 건 아닌데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걱정이었다. 그 말은 당연히 오케이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말해야 할 지에 대한 걱정이다. 상처받을 것 같기도 하고 아예 그 얘기가 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래서 일단 그 얘기는 미뤄두고 이전처럼 똑같이 지냈다.
3일이 지나자 궁금했는지 전화가 왔고 오겠다고 해서 대답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약속을 잡았다.
2023. 10. 29. 12:27, INFP : 안녕~~
2023. 10. 29. 12:27, ISFP : 통화가능?
2023. 10. 29. 12:30, INFP : 네, 6시 반에 볼까요?
2023. 10. 29. 14:52, ISFP : 넹~~
친구로 지내자고 했는지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거절’을 했는데 S는 크게 충격을 받지 않고 '나는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 표현해도 되지?’라고 명량하게 얘기했다. 이게 나름 거절인데 S가 무슨 의도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 정말 희한한 반응이다. 기대했다는 건가 안 사귀어도 괜찮다는 뜻인가 모르겠다.
집에 오니 마음이 더 좋지 않아 졌다. 그래도 S에게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이럴 땐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이모티콘으로 문제의 '하트'와 함께 인사를 해왔다. 그전에 없던 전투력이 생긴 건지 왜 거절을 한 이 시점에 적극적인 건지 잘 모르겠다.
2023. 10. 30. 17:25, INFP : 카톡하트라…
2023. 10. 30. 17:25, INFP : 카톡하트라…
2023. 10. 30. 17:41, ISFP : 우선 카톡하트 받아주세요~ 그리고 낼 만나자. 볼링데이트 해주세요~
2023. 10. 30. 19:30, INFP : 고고
2023. 10. 30. 20:04, ISFP : 오예 고고
2023. 10. 30. 22:02, INFP : XX도 끼고싶대요~콜했어요
2023. 10. 30. 22:03, ISFP : 알겠습니다. 낼 보니까 너무 좋다
2023. 10. 30. 22:05, INFP : 넹~^^ 낼봐용~~
정말 S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똑같이 행동했고 오히려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티를 냈다. 멘탈이 강한 건지 전략인 건지 뭘 잘 모르는 건지 행동의 의도는 잘 모르겠다. 둘 사이에 누가 끼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같이 보자고 했고 확실히 표현이 예전에 비해 과감해졌다. 사귀지만 않는 거지 같이 노는 건 즐거웠기 때문에 그냥 예전처럼 잘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잡아 놓은 마라톤도 사람들과 같이 했고 카톡도 똑같이 했다. 이제는 볼링이 끝나고 연락할 때도 엄청 적극적 이어졌다.
2023. 10. 31. 23:25, ISFP : 자기 잘가~♡♡
2023. 10. 31. 23:25, INFP : 취했네
2023. 10. 31. 23:26, ISFP : 아직 멀쩡해~~
2023. 10. 31. 23:33, ISFP : 잘하겠습니다.
자기라니…
그 뒤로 우리 동네와 와서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원정볼링을 가자고 하기도 하고 하자고 하는 건 뭐든 오케이였다. 물론 여러 사람과 함께다.
나도 그 사건만 빼고 노는 건 잘 맞았기 때문에 생각 없이 그냥 계속 같이 만났다. 누군가는 이걸 사귀는 거라고 하고 그게 경계가 있냐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정확히 경계가 있었다.
그래서 소개팅도 당당하게 할 수가 있었고 소개팅 상대에게도 아무 사이도 아닌 사이로 얘기가 가능했다. 정말 여차하면 남이 될 수 있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S의 태도도 이전과 같았지만 명확히 자신이 무언가 맺어야 할 게 남아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나도 느꼈다.
2023. 11. 2. 10:28, ISFP : 원정가자
2023. 11. 2. 10:41, INFP : 가자^^
2023. 11. 5. 11:17 ISFP : 거기서 몇시에 나와?
2023. 11.5. 11:17 INFP : 드라이브 가자
2023. 11. 5. 11:17 ISFP : 당연히 드라이브 가야지
2023. 11. 5. 15:35, INFP : XX네 연락왔는데 같이 볼치러갈까
2023. 11. 5. 15:36, ISFP : 하고 싶은거 다하삼~~
2023. 11. 5. 15:39, INFP : 요즘 왜 이러지?^^그럼 델러갈게~
2023. 11. 5. 15:42, ISFP : 엉~~^^ 기다리고있을겡~
11월 7일 화요일에는 A클럽 정기전을 하고 다음 날에도 저녁에 B클럽 번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 11월 8일에는 소개팅남이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잡은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점심에 만나 같이 밥을 먹고 공원을 걸으면서 얘기를 했는데 할 말이 바로 ‘잘 만나보자’는 거였다. 처음 서울에서 만나고 두 번째는 멀리 홍성에서 한번 다시 서울에서 한번 만났는데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긴 시간을 함께 하긴 했다. 만난 지 3번 만의 고백은 기분은 좋았지만 아무 느낌이 없었다. 그러고 나서 저녁에 B클럽 번개에 갔다. B클럽은 B라는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해서 몇 번 가본 클럽이었다. 게임방식도 새롭고 볼링에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뒤풀이가 없는 모임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나에게 더 잘 맞는 클럽이었다. 3번 이상 나가고 나니 사람들도 좀 알게 되고 했는데 거기에 S도 놀러 가게 됐다. B도 A클럽에 나오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서로는 친분이 있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아서 나를 제외하고 S와 B가 같이 담배를 피우던 자리에서의 대화다
B : INFP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시켜줘도 돼?
S: “되겠냐?”
바로 그날 게임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중간에 S를 내려주고 난 집까지 더 가야 했어서 S가 밤운전이니 편의점에 잠깐 들러 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다.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면서 ‘커피 고마워요, 볼링 재밌었어요’ 등등 잠깐 얘기를 하고 헤어지려고 하는 인사 끝에 ‘고백’을 해왔다.
ISFP : “사귀까?”
INFP : “그러까?”
저거면 되는 것을 돌려 말해 가지고 시작도 못하고 끝을 낼 뻔했다. 생각해 보니 B가 S를 푹 찔러서 갑자기 고백을 한 것 같다. S의 행동에 속도가 붙긴 했지만 B가 고백을 한 달 정도는 앞당겼다고 볼 수도 있다.